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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약 먹어야할지...선생님이 정해주세요"

"어떤 약 먹어야할지...선생님이 정해주세요"

  • 고신정 기자 ksj8855@doctorsnews.co.kr
  • 승인 2013.07.29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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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 (하)
국립의료원 성분명 시범사업 참여 의사 '증언록'
"예고된 실패...환자는 성분명처방 원하지 않았다"

대한약사회가 성분명처방 시범사업 재추진 카드를 꺼내들면서, 의약간 대충돌이 예고되고 있다.

약사회는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에 공문을 보내, 성분명처방이 약제비 절감 및 환자 선택권 보장에 기여할 수 있다면서 일산병원을 통해 성분명처방 시범사업을 진행해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약효동등성 문제에 따른 위해가능성 등을 이유로 성분명처방을 여전히 강력 반대하고 있는 상황. 2007~2008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진행됐던 첫 시범사업 사례를 들어, 이미 실패한 사업을 재추진할 이유가 없다는 반대론도 힘을 얻고 있다.

약사회는 '핵폭탄급' 파급을 불러올 성분명 카드를 왜 다시 꺼내들었을까. 5년전 실패의 경험은 잊어도 좋을 해프닝에 불과할까? 성분명처방 둘러싼 논란들을 <의협신문>이 꼼꼼히 짚어봤다.

(상) 위기 몰린 공단·약사회 '통하였느냐'
(중) 5년 전 참담한 실패, 교훈 잊었나?
(하) 의사들 생생 증언 "성분명처방 실패 이유는..."


성분명 시범사업 첫날이었던 2007년 9월 17일. 국립의료원은 그야말로 혼란에 휩싸였다.

성분명처방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없다보니 진료과마다 혼선이 빚어졌고, 환자들이 성분명처방을 거부하는 상황도 연출됐다.

정부의 용역을 받아 성분명사업 평가를 맡았던 연구팀은 시범사업이 마무리되어갈 시점인 2008년 4월 국립의료원 의사들을 대상으로 면담 및 설문조사를 진행한 뒤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면담기록에 따르면 성분명 처방에 참여했던 의료진들은 "환자들이 성분명처방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목소리로 밝혔다. 정부와 약계의 기대와는 달리 실제 약을 받는 환자들도 성분명처방을 받고 싶지 않아했다는 얘기다.

"의사 선생님 믿고 왔는데...선생님이 약 정해주세요"

당시 국립의료원에 재직하며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의사 A씨는 "환자들의 호응이 적어 처음 3주간 단 1명의 환자도 (성분명처방에) 동의하지 않았다"면서 "일부 환자는 '의사선생님을 믿고 왔는데, 왜 나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고 상황을 전했다.

"원래 먹던 약을 먹게 해달라" "다른 약을 먹지 않게 해달라"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선생님이 한가지 정해달라"는 요청들도 이어졌다.

의사 B씨는 "대체로 환자들은 성분명 처방에 부정적이다. 환자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상황을 전했으며, 의사 C씨도 "환자들이 복용약을 자꾸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환자가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장기투약환자에서 이 같은 경향이 뚜렷했다"고 말했다.

정부와 약계는 성분명처방을 통해 환자들의 의약품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환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약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셈. 여기에는 전문가인 의사가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한 약을 정해줄 것이라는 믿음, 또 약이 잘못 선택되어졌을 때 자신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이 함께 깔려 있다.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한 의사는 "환자의 선택권이 보장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면서 "성분명처방은 환자에게 약 선택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약사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국립의료원 성분명처방 시범사업 당시, 대한의사협회가 배포했던 성분명처방 반대 포스터.

전문가적 양심과 정부의 압박사이...그들은 고뇌했다

성분명처방이 국민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전문가적 소신을 가지고 있던 의사들은, 국공립병원 재직의사로서 정부시책을 따라야 한다는 압박감과, 의사로서의 양심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호소하기도 했다.

의사 A씨는 "환자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성분명 처방을 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면서 "처방률을 높이기 위해 환자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고 성분명 처방을 강요한 경우가 많으며, 시범사업 평가결과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의 강제로 처방을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의사 D씨는 "환자에게 적합한 약물을 조합·처방하는 것은 전문기술적 영역이므로 아무리 미미한 차이라도 의사가 이를 인지하고 약을 골라 처방하는 것과, 환자가 임의로 택한 약물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면서 "성분명처방이 강행된다면 자신의 가족에게도 알아서 약을 골라 먹으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성분명처방을 의무화하는 것은 환자 치료를 위해 적절치 않다"면서 "성분명처방을 반대하는 것은 집단이기주의나 리베이트 때문이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서의 최소한의 양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성분명처방이 강행된다면 의사들이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직을 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왔다.

의사 C씨는 연구팀과의 면담과정에서 "성분명처방이 강행된다면 직업적 윤리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의사들이 사표를 쓰게 될 것"이라고 털어놨다.

의사 D씨는 "성분명처방을 하려면 참여자 모두가 성분명·상품명 처방 여부에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면서 "그래야만 (정책 시행으로 인한) 피해가 환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협 "성분명처방 시범사업 불가...강행시 강력 대응

대한의사협회는 의사와 환자의 동의 없이는 성분명처방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국민들을 다시 혼란 상황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의협 고위 관계자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와 약을 먹는 환자 모두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도대체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성분명처방 시범사업을 다시 벌여야 한다는 말이냐"면서 "준비가 되어 있지도, 그러기를 원치도 않는 환자들에게 스스로 약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는 것은 호의가 아니라 강요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성분명처방을 재추진하자는 것은 환자가 아니라 약사에게 의약품 선택권을 달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약계는 직역이기주의에 기반한 성분명처방 주장을 이제 그만 거둬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의협은 약사회의 '오퍼'를 받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공단 일산병원을 향해서도 당부와 경고의 메시지를 남겼다. 

의협 관계자는 "보험자인 건보공단이 환자의 건강은 뒷전으로 한 채, 건강보험재정 절감이라는 성과주의에만 매몰돼 결과가 뻔한 '악수'를 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혹시라도 그 같은 일이 가시화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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