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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6 17:49 (금)
왜 인문학인가?

왜 인문학인가?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9.12.3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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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술〓소통"…깨우침 얻고 치유를 경험하며…

▲ 강신익(인제의대 교수 인문의학연구소장)
역사 이래로 지금처럼 의사되기가 힘들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수능성적이 모든 영역에서 1등급이 아니면 의과대학에 원서를 내기조차 어렵고, 학부 성적이 우수해도 의치학전문대학원에 가려면 여기저기서 스펙을 쌓아 능력을 증명해야만 한다.

대학이나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치열한 경쟁의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 엄청난 학습량은 말할 것도 없고 층층으로 쌓인 위계의 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자신의 개성을 숨긴 채 경쟁에 매진해야 한다.

지금은 문제바탕학습(PBL) 등 학습자의 활동과 환자의 질병경험이라는 실존적 맥락을 강조하는 교육방법이 도입되고 있는 추세지만, 의학이라는 학문은 여전히 물리과학의 환원적이고 기계적인 방법론과 세계관에 크게 의지한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환자의 몸은 기계이고 의학은 그 기계에 대한 지식이며 의술은 그것을 정비하는 기술이다. 물론 의학과 의술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정의하는 의학자는 거의 없다. 사람의 몸이 기계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안다. 우리 몸은 기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며 예측불가능하다.

여러 사람의 몸에 똑같은 자극을 주어도 거기에 반응하는 양식이 모두 다르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시대의 큰 흐름 속에는, 의학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발전한다면 머지않아 신체의 모든 신비가 밝혀질 것이고 거의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이 자리하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은 불확실한 현상과 이론적 확실성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킨다.

불확실성을 믿는 사람은 한의학을 비롯한 대안적 의료체계(보완대체의학 또는 대안의학)에 귀의하고 과학적 서양의학의 보편성을 믿는 사람은 대체로 유전정보의 조작이나 줄기세포와 같은 기술이 종국에는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두 관점 모두 '사람'이 아닌 '질병'을 중심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안의학의 주창자들이 질병의 경과가 과학적 방법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으므로 환원적 과학이 아닌 전일적(全一的)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과학적 생물의학의 신봉자인 우리들은 지금의 과학은 다소 불완전하지만 원리적으로 완전한 설명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의학의 전일적 접근이 질병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MRI 등 첨단 영상기술을 도입하여 증상을 신체의 한 부위로 환원하고 오래된 의서에 나오는 처방을 그것과 대응시키는 경우가 많다.

환자 개인의 증상에서 자연과의 관계를 추론하고 이로부터 처방을 논하는 변증론치(辨證論治)의 방법을 버리고 기계적 환원의 논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0세기를 달구었던 생물의학과 대안의학의 논쟁은 실은 전통의학이 생물의학의 과학적 세계관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의료사회학자들이 별다른 노력 없이도 현대의학 중심으로 두 의료체계의 일원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경쟁에 이긴다고 마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은 의학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포기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점과 그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협동보다는 경쟁, 전체보다는 부분, 유기체보다는 기계, 의미보다는 사실, 관계보다는 개체, 변화보다는 불변, 유기체적 불확실성보다는 기계적 확실성을 선호하는 우리들 자신의 성향이, 남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얻는 의료의 본질을 이렇게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현실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사람보다 질병, 치유와 보살핌(healing, care)보다 처치와 치료(treatment, cure)를 앞세웠던 시대의 정신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지난 세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잘 나가던 서양 의학이, 그동안 잊고 있던 윤리·철학·역사 등 인문학을 불러내기 시작한 것도 이와 같은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시대를 읽고 미래를 준비한다. 의학은 이런 인문학을 불러내어 시대의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읽어내려 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과거의 역사를 들추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말하며 윤리를 이야기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 행복한 삶을 준비하려는 것인데 이는 의학의 궁극적 목적과도 일치한다.

우리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반성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주기 때문이지 문제에 대한 새롭고 탁월한 해법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 아니다.

인문학은 환자든 의료인이든 사람을 변화시켜 질병을 이기고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질병 자체를 치료하지는 못한다.

▲ 의학의 다양한 모습을 신화를 통해 재미있고 의미있게 보여주는 그림. 왼쪽 끝이 의술과 상술 그리고 해석의 신 '헤르메스'이고 가운데 긴 지팡이를 가진 신이 의술의 주신 '아스크렐오피오스'다.

의학은 개별 생명체의 생물학적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도움 없이는 그 결과 환자를 포함한 자연과 사회의 생태가 어떻게 변해갈지를 예측하지도 그 변화에 대비하지도 못한다.

예로부터 의술을 인술(仁術)이라 했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술은 흔히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환자에게 봉사하는 바보 같은 의사의 행위를 일컫는 말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우리는 장기려 박사나 김수한 추기경 또는 테레사 수녀와 같은 분에게 존경의 염을 담아 '바보'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그분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어짊(仁)을 실천한 분들이고 그분들의 정신을 받들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도 인문학의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특수한 예를 통해 의료인 모두를 교화하려는 태도는 옳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보다는 어짊의 본뜻을 살펴 각자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고 인문적이다.

어질 인(仁)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음(人+二)이다. 함께 있음은 소통이다. 소통이 없이는 건강도 없다. 따라서 어짊은 함께 있음이고 소통이며 건강이다.

한의학에서는 기의 흐름이 막혀 마비에 이르는 현상을 가리켜 어질지 못함(不仁)이라 하는데, 서양의학에서는 환자와 의사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인술은 희생이 아니라 소통의 기술이다.

의술(醫術)을 인술(仁術)이라 했던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회와 인간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의술(醫術)은 소통과 치유의 기술(仁術)인데 그 대상이 국가나 사회일 때는 의국(醫國)이 되고 개인이 될 때는 의인(醫人)이 된다.

이는 세포병리학의 창시자이고 사회의학의 주창자이기도 한 비르쇼(Rudolf Ludwig Karl Virchow)의 "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학은 확대된 의학"이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의술은 치유와 소통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보면 인술이지만 이해관계의 합리적 조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상술(商術)이기도 하다. 의료기술이 상품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의술의 상품화와 의료기관의 민영화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여기서 의술을 상술이라 하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이후로 의술은 서로의 이해와 재화를 나누는 합리적 계약에 의해 행해졌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상술은 이해와 재화를 합리적으로 나누는 기술이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각자의 이기적 욕망을 채워도 좋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의술은 인술인 동시에 상술이다. 인간적으로 서로 소통하되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다.

의술은 신술(神術)이기도 하다. 의(醫)의 뿌리는 무(巫)에 있다고 하는데 무는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는 기둥 사이에 두 사람이 있는 형상이다.

서양의 신화에서 헤르메스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해석의 신이며 동시에 상업과 의술의 신인데 그가 들고 있는 상징물은 오늘날 대한의사협회와 군의(軍醫) 병과의 로고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 우리는 이미 의술은 인술지만 동시에 상술이며 신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새다.

의과대학의 입학이 어렵다고 그 경쟁에서 이긴 학생이 그만큼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경험보다는 시험이라는 생존의 방법을 익힌 기술자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생존의 방법보다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하여 그 의미들을 삶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게 해 준다. 훌륭한 이야기를 지어낸 삶은 아름답고 건강하다. 이 글 역시 의학의 역사에서 찾아낸 사실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왜 인문학인가?'라는 질문에 맞춰 풀어낸 하나의 이야기다. 필자인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깨우침과 치유의 경험을 한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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