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우리 민석이 노래 잘했어?"
반갑게 안아주며 말했지만 아들의 표정이 어딘지 시무룩했다.
"으응……. 근데 실수를 했어. 고음 내기 전에 숨을 잘 못 쉬어서 목소리가 안 나왔어."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토닥거려도 좀처럼 얼굴이 밝아지지 않았다.

차내 거울로 슬쩍 보니 눈과 볼이 빨개진 채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차 안에서 엄마랑 통화를 하며 울먹거리더니 끝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막상 노래를 하는데 다리가 자꾸 떨려서 제대로 못 불렀어…. 가사도 까먹고 고음도 제대로 못내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괜찮아 우리 아들, 아무것도 아니야……."
아들을 달래는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여의도의 모 방송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서 노래경연대회 준비를 하다 선생님이 '누가 누가 잘하나'에 한번 도전해 보라며 방송국에 접수를 해놓았다. 아들이 영어학원에 가는 시간과 겹치기도 해서 망설였지만 일단 참가하기로 했다.

예선심사장에 가보니 참가자가 많아 북새통이었다. 대기시간에 잠깐 밖으로 나와 연습할 때는 곧잘 하더니 막상 심사위원들 앞에서는 제대로 못했나 보다. 보호자나 선생님의 참관을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낯익은 얼굴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아니면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맥이 빠져버렸는지도. 다리가 자꾸만 후들거렸다고 하는 아들의 말을 듣다 나도 그렇게 다리가 후들거렸던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방송국에서 노래경연대회 촬영이 나오는데 한번 나가보지 않을래?"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반주를 해주시던 선생님도 내 노래를 들으며 흡족해 하시는 것 같아 뿌듯했다. 얼마 후 학교 안의 소강당에서 녹화를 했다. 내 차례가 됐다. 여자 아나운서가 나를 소개했다.

"네! 이번에 노래 부를 어린이군요. 부를 노래는 '기러기'인데 멋지게 잘 불러주세요."
그녀가 미소를 짓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좌중의 박수를 청했다. 물론 나 역시 멋지게 잘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다다다달 바아아알 그으으은……."
머릿속으로는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하고 가사와 멜로디가 매끄럽게 흘러가는데 어이없게도 '다다다달……' 대목만 덜덜 떨면서 부르고 있었다. 제작진은 잠시 촬영을 멈췄다.

"우리 어린이가 긴장을 많이 했나 봐요, 자! 마음을 편히 가지고 다시 한 번 잘해보세요."

진행자가 웃으며 나를 격려해 줬지만 그 역시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NG를 너덧 번은 낸 것 같다. 모두가 지쳐갔다. 아무리 잘해 보려고 해도 목소리는 말할 것 없고 다리와 몸통마저 후들거리는데 정말이지 괴롭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생님들과 방송국에서 나온 분들께 죄송했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던 진행자는 '다음 기회에 잘해보자'며 나를 달래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난 제대로 심사를 받아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지금도 이 창피한 기억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이 우스워 혼자 빙긋이 웃기도 하고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곰곰 생각해보기도 한다. 때로는 그 정겹고 코믹한, 흑백 TV 속의 촌극 같은 광경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신기한 건 그날의 수모 이후로 어느 연단이나 무대에서도 별로 떨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그 날의 실패가 일종의 백신처럼 작용해 나를 강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울부짖는 이유를 "이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 위에 서야 하는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도 이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뭔가를 말하고, 보여주고, 연기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왕이면 당차고 멋지게 말하고, 노래도 부르고, 연기도 해내야 하지 않을까.

깊은 산속 바위틈에서 바람소리 들으며 밤이 되면 별빛 총총 머리에 이고
향기로운 풀꽃으로 피어났어요 그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나는 외롭지 않은 풀꽃이에요 나는 울지 않는 작은 풀꽃이에요. (풀꽃의 말-박수진 작사)

아들이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음미해보며 마음 속으로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노랫말처럼 좋은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는 사람이 되거라. 때로는 사람들이 너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외로워하거나 울지 말고 묵묵히 너만의 길을 반듯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되려무나. 오늘의 실패나 실수는 반드시 미래의 성공과 보람의 밑거름이 될 거야. 그러니 언제나 밝게 웃으며 살아가렴……."

다시 한 번 거울 너머로 뒷좌석을 보니 아들이 지친 모습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다소 번거로웠지만 도전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학원에 못 보낸 것도 별로 아깝지 않았다. 앞으로 점점 더 커져 갈 인생의 무대 위에서 자신을 멋지게 보여줄 아들의 모습을 차창 밖 하늘에 그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