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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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2.2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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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종(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김연종 원장
분명 새해인데 전혀 새롭지 않은 새해가 또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 세모(歲暮)의 다리를 건너가는데 까닭 없이 힘겹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몇 번을 다짐해도 헛수고이다. 이 시대에 한국에서 사는 것이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누가 대신 나의 삶을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검색어는 '비선실세 국정농단'이다.

비선 실세로 지목된 자가 태반주사나 비타민 주사 등을 대리처방 받고, 국가 주요 인사나 정책에까지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부터다. 이 모든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대리'가 아닐까. 자신의 몸 상태를 타인에게 부탁해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대리처방은 환자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끼칠 수 있어 법으로 정하고 엄격히 다스리고 있다. 의료법 제17조 제1항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를 직접 진찰하도록 돼 있다. 이를 위반하고 대리처방을 한 의사는 자격정지는 물론 형사처벌을 받게 돼 있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가령 환자가 같은 질병에 대해 재진 및 처방을 받을 경우인데, 병원에 나오기 힘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이런 환자라 할지라도 의사가 안정성을 인정한 경우에만 대리처방이 인정된다.

최근 몇 건의 대리처방을 한 적이 있다.

오랜 세월 혈압약을 처방받은 구순 노파인데 얼마 전 요양원에 입소하고 말았다. 약간 치매 증상을 동반하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총명했다.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자식 자랑만 늘어놓고는 쏜살같이 진료실을 빠져 나가곤 했다. 그런데 며칠 전 비쩍 마른 칠순 노인이 그 할머니의 처방을 부탁한 것이다.

그는 요양원에서 건네준 혈압 기록을 성적표처럼 내밀며 어머니의 혈압이 잘 조절돼 기쁘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나는 할머니의 안부를 여쭈며 처방전을 내어 주었지만 솔직히 아들 노인의 건강이 더 걱정됐다.

두 번째 환자는 예순을 훌쩍 넘긴 중증 장애인. 물론 본인은 단 한 번도 병원을 방문한 적이 없다. 나는 딱 한 번 그의 집에 들른 적이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위한 의사소견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누추하기 짝이 없는 집에 식구라곤 단 둘이었다.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훨씬 더 늙은 노파가 그의 누나인데 우리 병원 단골환자이다. 장애인 동생은 아직까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누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얼마 전 노파가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관절염 증세가 도졌다며 동생의 증상을 조목조목 적어서…. 나는장애인 보호시설이 더 낫지 않겠냐고 권유하며 슬며시 의중을 떠보았다. 하지만 노파는 펄쩍 뛰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어떡하든 돌보겠는데 내가 죽고 난 후가 걱정이라는 것이다. 본인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지만 나는 병든 노파가 더 마음에 걸렸다.

강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낯익은 50대 고혈압 처방 환자가 대기환자 명단에 떠올랐다. 그런데 문을 열고 진료실로 들어온 사람은 명단의 환자가 아닌 중후한 여인이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상담하러 온 것이리라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심각한 표정의 여인은 앉자마자 대뜸 질문부터 했다.

"혈압약 성분이 성욕 감퇴를 유발할 수 있나요?"

"최근의 혈압약은 그런 경우가 거의없습니다만. 혹 심리적 요인이 동반될 수 있으니 혈압약을 바꿀 필요는 있지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비아그라를 처방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리란 남을 대신해 일을 처리함,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대리시험, 대리통치, 대리인생 등 그 단어에는 부정적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다. 대리란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리라. 대리처방도 마찬가지다.

더 자세한 상담을 하기도 마뜩찮아 본인한테 직접 설명하고 처방해 주겠노라고 만 약속했다.

휑하니 진료실을 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왜 그리 쓸쓸한가.

나는 자꾸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네이버에 '남편 대신 비아그라 대리처방'을 검색해 보았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친절한 답변이 올라와 있었다.

"고혈압이나 심장질환이 없다면, 직계가족에 한해 비아그라나 시알리스 단기 처방은 가능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바로 이런 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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