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7 13:15 (토)
"병협의 항복 = 병원 의사의 항복 아니다"

"병협의 항복 = 병원 의사의 항복 아니다"

  • 이석영 기자 lsy@doctorsnews.co.kr
  • 승인 2012.05.31 11:14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건정심 찬성표 던진 병협에 비난 화살 집중
12년 전 '판도라의 상자' 글 새롭게 다가와

포괄수가제 강제·확대 시행안이 건정심(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되자 정부에 대한 의료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건정심 회의에서 정부안에 찬성표를 던진 병원협회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의협은 건정심 회의가 열린 30일 성명을 내고 "병협이 찬성한 것은 충격적인 일"이라며 "앞으로 발생하게 될 국민 피해에 대한 책임은 정부와, 정부의 회유와 압박에 타협한 병원협회의 몫"이라고 성토했다.

같은 날 열린 의협 상근임원 및 국장회의에서 노환규 의협 회장은 "병협과의 업무 협조 무기한 중단"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병협의 '변절'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병협은 지난 2월 열린 건정심 4차 회의에서 그 때까지 의협과 '반대' 입장을 유지해 오던 것에서 돌변, 포괄수가제 7월 확대시행안에 찬성 쪽으로 돌아서버렸다.

사실 의협과 병협은 '적과의 동침'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항상 불안정한 상태의 공조를 유지해 왔다.

의사 개인이 주체가 되는 의협과 달리, 병원 경영자들의 모임인 병협은 태생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에 훨씬 더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의권' '의료의 질' '국민의 건강권'과 같은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의협과 늘 동일한 행보를 취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다.

올해 선출된 김윤수 병협 회장의 입장 변화는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는' 병협의 이중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김 회장은 지난 14일 취임 기자 간담회에서 포괄수가제(DRG), 영상장비 수가인하 등 현안 타개를 위해 의협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해 의-병협 정책공조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으나, 불과 보름 만에 '전임 병협 집행부가 찬성해서 어쩔 수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남기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총파업 당시에도 의협과 '엇박자'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병협의 이러한 자세는 지금부터 12년 전 의료계 총파업 당시에 이미 보여주었다.

병협은 의약분업 최종 시행안이 확정된 1999년 9월 17일 의약분업실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료계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정부의 의약분업안은 수용할 수 없다"며 의협과 함께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곧이어 의약분업 최종안에 반대하는 성명을 공동 발표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의료계 3차 파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동네의원 중심의 1·2차 파업에 이어 6월 20일부터 병원계의 가세가 본격화된 3차 파업이 시작되면서 의료계의 공세 수위는 절정에 달했다.

당황한 정부와 여당은 23일 당정회의를 열고 일단 7월부터 의약분업을 실시하되 문제점이 드러나면 약사법 등을 개정하겠다는 내용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의쟁투는 이를 거부하고 강경투쟁을 계속키로 결의했으며 전공의협의회 역시 파업투쟁을 지속키로 했다.

문제는 병협이었다. 정부의 회유책이 던져진 바로 그날 폐업투쟁 철회를 공식 선언해 버린 것이다. 당시 병협의 폐업 철회는 극에 달했던 의료계 투쟁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었다.

병협이 '선시행 후보완'이라는 정부의 당근책에 물러선 전과는 12년이 지난 이번 포괄수가제 강제시행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된 것이다.

"정부도 병협이 항복할 것 알고 있어"
의약분업 사태로 전 의료계가 술렁였던 2000년 초 '판도라의 상자'라는 장문의 글이 의사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의약분업의 본질을 다룬 이 글은 당시 삼성서울병원 내과 2년차 전공의였던 민 모 의사가 쓴 것으로서, 의약분업을 '의료사회주의와 의료자본주의자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린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정의 내려 의료계 안팎의 공감을 불러 모았다.

글 내용 중에는 병협이란 단체가 의료계에서 갖는 의미, 특히 정부와 의료계의 충돌 상황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꼬집어 12년이 지난 오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글은 "혹자는 의사=병원으로 생각하는데 이 둘은 매우 다르다. (중략) 이들이 장기적으로 의사폐업에 동참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000병상 이상의 병원에서 하루 동안 폐업에 따른 손실액이 5억 원이 넘기 때문이다. 작은 중소병원은 며칠 더 가면 부도위기에 몰릴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복지부나 정부도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결국 항복하고 나올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상당히 타당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병원의 항복이 의사의 항복은 아니며, 이 둘은 매우 다르다"고 강조함으로써 투쟁의 주체가 병원이라는 기관이 아닌 의사 개인에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포괄수가제 강제·확대 시행을 둘러싸고 의협과 병협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병원 봉직의로 구성된 단체나 병원의사 노조 설립의 필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이번 사안을 계기로 의협과 병협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고, 병원 소속 의사들의 조직화 역시 탄력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