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7 13:15 (토)
모란이 피기까지

모란이 피기까지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0.07.02 09:52
  • 댓글 1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변형석(서남의대 교수 소아청소년과)
다산초당을 다녀와서…

지난 3월 13일,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艸堂)을 다시 한번 찾았다. 다산선생을 직접 찾아뵙는 것 같은 설레임이 앞선 것은, 선생의 삶을 다시 한번 조명해보고 싶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욕망이기 때문이었을까?

왕복 300여Km의 운전이 하나도 피로하지 않고, 바다를 끼고도는 해안을 따라서 바다 내음과 바다가 끝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갔고, 강진 마량부두에서 자연산(?) 광어회와 장흥에서만 난다는 '꼬시래기'(톳과 비슷한데, 메밀국수처럼 기다란 해미(海味)를 그 지방에 이름 붙였단다)를 한접시 더 달라해서 먹었던 덕분이었나 싶기도하고….

정약용. 자는 미용(美鏞), 아명은 귀농(歸農), 관명은 약용,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삼미(三眉)·열초, 당호는 여유당(輿猶堂)이었고,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 본관은 나주이다. 미물인 필자는 이름 석자도 못 알리는데, 큰 분이라 별명이 많기도 하다.

1762년 6월16일 즉 영조 38년에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재(소내), 즉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 1836년 2월 22일 공교롭게도 그의 회혼일(결혼60주년)인 헌종 2년에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때(1783년) 22세되던 2월에 세자(훗날 순조) 책봉을 기념하는 경의초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그의 형인 약현. 약전도 같이 합격했고, 4월에 치른 회시에도 합격해 정조의 총애(?)를 받아 승지에 이른 조선 후기 실학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의 인생 또한 파란만장했다.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꽤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승훈신부, 요한 정약용과 형인 약전·약종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의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에 강진으로 이배됐다.

다산은, 기본적으로 정조의 정치참모로서 정치개혁을 구상했던 실천적 사상가였다.

정조는 다산에게 병서를 건네주면서 연구를 독려했다. 다산의 군사론 핵심은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는 왕권 강화였다. 군제를 어떻게 바꿔야 왕이 직접 장악할 수 있는 병력을 확보할 수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순간, 현실을 내다보며 옛날의 임금이나 지금의 대통령이나 똑같구나 싶다.

유배기간(11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며 사회적 모순에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이 때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등 500여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 <주례>등 <육경사서>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 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철학·법제·종교·의술·천문·측량·건축·음악에도 남다른 관심과 가치관을 가졌고, 거문고 연주솜씨가 뛰어나 1802년 12권의 <악서고존>을 집필했다.

어떤 사람은 다산의 경학 연구는 단순히 경학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노론벽파와의 정치권력 투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는 각각 중앙, 지방 행정제도와 형정(刑政)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담은 글이라는 것이다.

▲ 전남 강진 다산 초당 전경.

그의 나이 57세때(1818년), 이태순의 상소로 18년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으나 관직에 나가지않고 고향인 경기도 광주 소내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으며 당대 명사들의 발길이 잦았다고 한다.

고향 소내로 돌아오는데 3일이 걸렸다는데, 그의 여유로움과 흥겨움을 엿볼 수있다.

어릴적 노닐던 수종사(水種寺; 돌틈으로 흘러나오는 샘물이 땅으로 똑똑 떨어질 때 종소리가 난다해서 지은 이름)로 가서 3대 즐거움을 얘기했는데, "첫째는,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둘째는, 곤궁했을 때 지나온 곳을 뜻을 이루어 찾아온다면? 셋째는, 홀로 외롭게 오가던 곳을 아름다운 손님들과 좋은 벗들을 이끌고 온다면?"이었다고 한다. 역시 대인이었나보다.

다산초당.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허물어진 것을 1950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문화재의 보존에 대한 중요함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기 위해, 방명록의 바라는 글에 '원래대로 초가집으로 복구하길…'이란 글을 남겼다.

오래 전에 왔을때는 비포장이어서 고생했는데, 주차를 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니 서암(보수공사중)이 있고, 초당을 지나니 동암이있고, 천일각이 있어 마루에 올라 바라보니, 눈앞에 확트인 바다가 보인다.

흑산도로 유배간 형 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이라는데, 다산은 이곳에 올라 조정을 향해 큰 탄식을 내뿜고 가슴을 다시 추스르고 초당으로가 집필을 하셨겠구나 싶다.

다산 초당마루와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집재해서 새겼다한다.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 선생이 직접 새겼다고 하는 정석(丁石),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씨인 丁자만 따서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돌아 오는길 갑자기 김영랑 시인이 생각나, 읍내에 있는 생가에 다다르니 오후 6시, 막 문을 잠그고 있는 중이어서 간청을 하여 얼른 둘러보고 나오니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비가 있고, 그 옆에 모란의 꽃봉우리가 멍울져 있었다. 밖으로 나와 '예던길'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다가가 보니 다산과 영랑이 걷던길 이란다.

다산도 처음엔 이곳에 유배되었으나, 외가가 해남윤씨 윤선도의 후손이었기에 그들이 조용한 곳에 초당을 지어줘 옮기었다고 한다.

하루해가 기울지만 왠지 다산선생의 마음이 되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