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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 삶 살다간 한 젊은 의학도를 추억하며

열정적 삶 살다간 한 젊은 의학도를 추억하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10.02.0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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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은해 조교수 1주기를 앞두고

▲ 고 강은해 조교수

벌써 1년전인 지난해 3월 4일 누구보다도 부지런했고, 다정다감했고, 유능했던 젊은 의학도 한 사람을 잃었다. 강은해 고려의대 조교수(고려대 안암병원 호흡기내과).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그였지만 1주기를 맞아 그의 삶을 돌아보며 추모한다.

내가 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경북의대 3학년 산과강의 시간이었다. 첫교시를 마치고 휴식시간이었다. 어떤 여학생이 다가오더니 "고모부, 안녕하세요. 저 은해예요"하며 미소띈 얼굴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처조카되는 학생이었는데 집사람으로부터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만난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1969년 공군병원 근무를 마치고 도미해 뉴욕과 위스콘신 생활을 거쳐 1990년 귀국한 탓에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첫인상이었지만 참 총명하게 생겼다고 느꼈다.

그 후 졸업하고, 결혼하고 서울삼성의료원에서 인턴으로 첫발을 내딛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 내과전문의과정을 마치고 계속해서 전임의사, 임상전임강사를 마친 것이 2006년 봄이었다.

그동안 강 선생은 특출한 실력과 환자를 자기 몸 이상으로 돌보는 진지한 의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만날 때마다 둘째 여식인 은해가 서울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과 주변의 인정을 받아 호흡기질환 환자들은 강은해 선생만을 찾는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연한이 되어 조교수 발령이 나올 때가 되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실력있고 자격도 갖추었지만 출신학교가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결국 그 곳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당시 강 선생은 검진센터에 자리를 권유받았다. 정시 출퇴근(09~17시)에 급여도 좋고 스트레스도 적은 편한 조건이었지만 의사 강은해는 그 자리를 거절했다.

자기가 있을 곳은 편한 근무처가 아니고 갈고 닦은 의술을 펼칠 수 있는 곳, 호흡기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있는 곳, 그들을 위한 연구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곳이라고 고집하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침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특채되어 2006년 3월 1일부터 임상조교수로 근무를 시작했다. 물론 그 곳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모교출신들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강 선생은 타대학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 선생은 위축되지 않았다.

강 선생은 안암병원은 물론 의료원 내 구로병원·안산병원을 두루다니며 내과전공의들을 대상으로 호흡기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관한 특강을 했다. 결과는 호평일색이었다. 가는 곳 마다 강 선생의 강의는 감탄과 찬사를 받았고 그렇게 반발은 잦아들었다.

새 직장에서도 그는 연구활동과 논문발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전 근무지인 삼성의료원을 비롯 초청강사로 여러 연수강좌에 참여하면서 후학양성에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에도 타 대학 출신이라는 꼬리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시기에 가까운 경쟁의식은 강 선생에게 많은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환자 위주로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처리하면서 실력도 갖췄고 최상의 친절과 배려로 환자 한사람 한사람을 대하는 강 선생에게는 입소문으로 몰려드는 환자 때문에 밤 11시 전에 퇴근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고도 다음날이면 아침 일찍부터 회진하며 환자 상태 파악에 만전을 기했다.

강 선생 혼자서 보는 환자수가 점점 많아졌고 병원수입 역시 그랬다. 뿐만아니라 꾸준한 연구활동으로 국제학술대회에서 당당히 발표하고, 토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바쁜시간중에도 짬을 내 연수강좌는 물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시간을 할애하는 등 대중계몽에도 적극적이었다. 전문의학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30여편이고, 그 중에는 권위있는 국제학술지에도 여러편 등재됐다.

이런 활동 때문이었는지 2007년 1월 강 선생은 연구실적을 인정받아 당시 장동익 대한의사협회장으로부터 대한의사협회 편집위원회 간사로 위촉됐고, 2009년 1월에는 대한결핵및호흡기학회 간행위원으로 위촉받기도 했다.

강 선생은 의학도로서, 교직자로서, 사회적·경제적 우대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한사람이라도 더, 하루라도 빨리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불타는 참된 의학자였다.

2005년 둘째딸 수빈을 출산하고 심장판막레이저 수술치료를 받다가 검사과정에서 뜻밖에 복부 대동맥류가 발견됐다. 그 정도가 심각해 수술이 불가능했다. 강 선생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알리지 않았다.

강 선생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서도-상식적으로 그 상황이라면 바쁘고 힘든 직책을 벗어던지고 편하고 스트레스 적은 직장으로 바꾸어 하루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도록 애쓸것이지만 그는 계속 환자진료와 연구에 몰두했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임상조교수로 만 3년 근무를 마치고 2009년 3월 1일 고대하던 조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이어 새로운 리서치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강 선생은 조교수가 된 며칠 후인 3월 4일 평소처럼 아침 일찍 출근해 회진을 시작했다. 그 순간 강 선생은 병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응급수술실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강은해 조교수의 나이 38세. 의대를 졸업하고 12년,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환자 치료와 연구업적을 남겼고 후학양성과 호흡기내과질환의 진단과 치료분야 발전을 위해 희생적 노력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강은해 조교수를 보낸지 벌써 1년. 열정적이었던 한 젊은 의학도를 추억하며 그의 가족에게 위로를 보낸다. 다시한번 강은해 조교수의 명복을 빈다.

송문원(전 대구효성병원 명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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