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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존엄하게 죽을 권리' 인정 판결

국내 첫 '존엄하게 죽을 권리' 인정 판결

  • 이석영 기자 lsy@kma.org
  • 승인 2008.11.2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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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집중분석]서부지법 "환자의 인공호흡기 제거하라" 선고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환자의 요구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정한 첫 판결이어서 큰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2민사부(재판장 김천수)는 28일 김 모씨와 그의 가족이 학교법인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 선고 공판에서 "피고는 원고에 대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주문했다.

김 씨는 지난 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폐암 검사를 받던 중 뇌 손상을 입어 식물인간이 됐으며, 김씨 가족들은 병원을 상대로 인공호흡기 제거 등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생명연장이 무의미한 경우의 치료중단 의무의 유무 ▲환자의 회복가능성 및 치료의 의학적 무의미성 ▲환자 본인의 의사표현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범위 등이다.

우선 재판부는 환자의 사망을 직접적으로 초래하는 치료중단에 대해서는 응급의료법 등 관련법에 따라 의사는 인공호흡기 제거 요구에 응할 의무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생명의 연장이 무의미해 환자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더 부합하고, 죽음을 맞이할 이익이 생명을 유지할 이익보다 더 큰 경우에는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하는 환자의 자기결정권 행사를 의사가 거부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즉 의학기술의 발달로 생체기능의 유지 및 생명의 연장이 가능해짐에 따라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는 오히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따라서 환자의 요구에 반하는 연명치료는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개인의 인격권·행복추구권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환자의 명시적 의사표시 없어도 '추정'으로 가능"

재판부는 환자의 치료중단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첫째, 치료를 계속하더라도 회복가능성이 없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며 둘째, 환자 스스로 치료중단 의사를 표명한 경우여야 한다는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고 밝혔다.

우선 회복가능성에 대해 재판부는 김 씨가 76세의 고령으로서 8개월째 식물인간 상태로 있으면서 자발호흡이 불가능하고, 뇌간 기능의 일부만 살아있어 외부자극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대뇌피질이 파괴되 거의 뇌사에 가까운 상태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기대 생존기간이 3~4개월에 불과하다'는 신체감정 의사의 증언을 받아들여 "김씨가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인공호흡기 등의 도움 없이 생존이 가능한 상태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

따라서 재판부는 "인공호흡기 부착의 치료행위는 상태 회복 및 개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치료로서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에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가 반드시 서면 등을 통해 명시적으로 표시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한 점이다.

즉 환자가 사전에 가족이나 친구 등에게 구두로 의사표현을 했으며, 타인에 대한 치료를 보고 환자가 보인 반응, 환자의 종교, 평소의 생활 태도, 기대 생존기간과 나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

재판부는 김 씨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3년전 남편이 심장질환으로 임종을 맞이할 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기관절개술을 거부하고 그대로 임종을 맞게 한 사실, 가족들에게 '내가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 소생하기 힘들 때 호흡기는 끼우지 마라. 기계에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 등을 참고했다.

또 현재의 절망적 상태 및 기대여명기간, 현재 나이 등을 고려해 김씨가 평소 생명연장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했다.

환자 가족의 '치료중단' 요구는 기각

재판부는 김 씨의 요구를 추정해 의료진에게 치료중단을 주문했으나, 김 씨의 가족들이 주장한 치료중단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대해 재판부는 "환자의 생명연장치료로 인해 가족들이 경제적·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치료의 중단청구는 타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가족들의 독자적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입법이 없는 한, 가족들의 청구권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김 씨에 대한 진료계약을 가족이 했으므로 계약해지 권리 역시 가족에게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 보호자가 계약을 해지한다고 해서 곧바로 환자인 제3자에 대한 의사의 치료의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며, 치료의 계속 및 중단은 여전히 환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같은 재판부의 판단은 환자 가족들의 독자적인 치료중단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연명치료 중단 요구가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방지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의료계 '환영'...세부적인 가이드라인 뒤따라야

이번 판결에 대해 지금까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반대해 온 의료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 재판부가 "회복불가능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른 치료중단 요구를 의사가 받아들여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경우에는 응급의료 중단의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것으로서, 의사는 민·형사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고 판시, 의사의 법적책임을 명확히 한 사실에 의미를 두고 있다.

의료계는 앞으로 법적·제도적 후속조치 마련에 서둘러야 한다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김소윤 연세의대 교수(의료법윤리학교실)는 "이번 판결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가망없는 연명치료 중단을 현실화했다는데 의미강 있다"면서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제도적 뒷받침과 가이드라인 마련 등 후속조치"라고 강조했다.

이번 재판부도 판결문을 통해 "의료진이 환자의 치료중단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경우에 관한 요건을 입법으로 자세히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혀 앞으로 의료법 등 관련법 개정 논의가 활발해 질 것으로 전망된다.

의료법 개정 등 제도추진 활기띨 듯

지난 17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이 '의료심사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불필요한 연명치료 의 중단을 허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의료계는 가급적 현행 의료법과는 별도로 특별법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객관적인 확인 절차,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의 의사표시 대체 방법 등을 명확히 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호스피스완화의료의 제도화 추진도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건복지가족부가 입법예고한 암관리법 개정안은 말기암 환자의 고통스런 죽음을 연장하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담고 있다.

한편 연세대학교는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이번 소송은 1심에서 종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의사가 환자측 요구에 따라 치료를 중단했다가 대법원으로부터'살인 방조죄'를 선고받은 '보라매사건'이후 10년만에 환자의 존엄한 죽음이 법적으로 인정됨에 따라 앞으로 '존엄사'를 둘러싼 의료계를 비롯한 사회각계의 논의가 뜨거워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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