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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과학이다

의학은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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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0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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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훈(재미의사/의학칼럼니스트)

-일본의 과학입국…노벨 과학상을 보고


3년 연속에다 금년에는 2인이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낸 일본열도는 현재 흥분에 휩싸여 있다고 들린다. 너무나 부러운 일이다.

1987년 일본인 도네가와(利根川)는 현대의학의 첨단이라 할 면역학유전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탔다. 그리고 이번의 화학상수상자인 다나까(田中)의 연구는 단백질 같은 생체고분자를 분석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며, 이 방법으로 생체과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식품검사와 전립선암의 조기진단 등 의학에 응용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는 점에서 기초의학분야의 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경제대국 일본은 이제 그들의 소원이던 과학대국의 기반을 견고하게 확립해가고 있다.

일본과학이 한때 미국과 유럽에 뒤쳐졌던 이유를 "일본인의 창조력 결여"라고 단념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이를 부정하는 학계와 언론의 '자기비판' 역할도 컸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원래 창조력이 결여된 국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창조적 연구가 많고 적고 하는 것은 창조성을 살리는 사회환경과 교육연구시스템에 좌우되며, 일본은 이러한 창조성을 높이는 시스템이 부족하다"면서 교육, 연구환경의 혁신을 위해 끈질긴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2001년에 이미 정부로 하여금 GDP의 1%를 과학기술연구개발에 투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노벨과학상의 연속배출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기회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에 사는 필자주변 동양인을 관찰해보자면, 한국인 1.5세대나 중국계가 일본계보다 더 두각을 나타내며 우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수한 한국인이 아직 노벨 의학상등 학술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히 교육연구시스템 등 잘못된 여건과 의식구조 탓일 것이며, 필자는 일찍이 여기에 대한 소견을 쓴 바 있다(참조: www.issuetoday.com 노벨과학상과 문학상은 언제쯤 가능한가?).

과학입국은 강력한 정부의 의지와 영도력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의료분야를 두고봐도 한국현실은 130년 전의 일본정부의 현대화노력과 비교해서 한심할 따름이다(다음 장 참조).
한국에서 국민계몽과 의식개조를 위한 학계와 언론의 채찍질도 중요한데,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노벨과학상을 우리 한국도 받아야 한다"는 훌륭한 신문논설에도 불구하고, 같은 신문 다음 장에는 전통의학건강법과 대문짝 만한 보약광고가 동시에 게재되고 있다. 말과 행동이 상반된 사설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때부터 정부주도하에 의학현대화의 토대를 잡아, 현재 '세계 제일 장수국'이라는 국민건강을 누리고 있다. 전통의학이라는 원천적인 모순을 안고 현재 방황하고 있는 한국정부의 의료정책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2백 몇 10년 전 연암 박지원 선비가 당시 조선이 멸시하던 나라 일본의 좋은 점을 본따서 조국을 근대화하려 했던 고사는 오늘날의 한국의료를 염려했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필자의 글(책 '생활속의 역사탐구')에서 그의 높은 뜻을 여기에 다시 인용해 본다.

연암과 일본의 란의학

우리 옛 조선은 지식인이 지배하는 사회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화기이전의 조선인물들 책을 읽는 가운데, 깜짝 놀랄 식견과 선견지명을 지닌 선현들을 자주 접하며 과연 우리 조상은 위대한 분이 많았다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중에서도 이씨조선시대 의학도가 아니면서도 우리나라 의학의 후진성을 개탄한 연암 박지원의 한 단면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여행기행문 '열하일기'를 쓴 바 있는 연암은 조선후기의 으뜸가는 실학파 학자이다. 그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조선의 개화에 눈뜬 대표적 인물중의 한 분이다.

쇄국의 암흑시기였던 조선사회에서 그가 보인외국서적에 대한 탐구욕과 조국개화에 대한 정열을 접할 때, 마치 캄캄한 밤하늘에 섬뜩하게 비치는 번갯불을 연상하듯 너무나 실리(과학)적이고 서구적 안목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조선을 지탱해온 절대적 사상인 주자학에서의 이탈이나 그에 대한 비판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사상에 배반하는 역적)으로 매도되는 사회에서, 외국학문에 대한 향학력을 바탕으로 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상은 조선의 개화에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열하일기'를 읽어가면서 필자를 더욱 감탄케 한 것은 그가 중국 땅에서 외국의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에 관한 책을 구하려고 무던히 애썼던 장면이다.

그 내용의 글을 옮겨본다.
〈우리나라는 의학수준이 낮은데다가 약재마저도 많지가 않다열하에 있을 때 이점에 대해 느낀 바 있어 전문가 한 분에게 물었다.
"근래 의학서적가운데 새로운 처방이 실린 책으로 사갈 만한 책이 있습니까?"
"근세에 일본에서 발간한 '소아 경험방'이 가장 좋은 책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원래 서양에 있는 화란사람들이 저술한 책이라고 합니다."
나는 북경으로 돌아와 화란인의 저술인 '소아 경험방'과 서양책인 '수로방'을 사려고 서점으로 돌아다녀 봤으나 없었다〉.

몇백년 전 일본에 서양의학인 란의학(蘭醫學)이 있었다는 사실을 현대한국지식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200년 전 쇄국의 나라 조선의 유교선비가 이 '란의'에 주목하여 란의학책을 찾아 해맸다는 사실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그의 강한 집념을 말해준다.

외교사신으로 중국 나들이하면서 조국개화를 위해 외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문물, 그것도 자기 전공과 거리가 먼 의학서적마저 구하려는 그의 애국심에 감탄한다. 근래 국민의 혈세로 외유하는 한국선량들의 불미한 일들이 자주 보도되나, 연구자료 수집해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옛 선비는 일본서 만든 '화란의학서적'이 중국에 수입, 번역되어 이름높은 의학서적으로 정평이 나 있음을 주목했던 것이다. '왜놈나라'라고 일본을 무조건 멸시하던 다른 유학자와 다른점이다. 그리고 그 책을 구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여기서 옛 일본의학을 잠시 소개하자면, 일본은 발달된 서양의학 기술을 화란(和蘭, 네덜란드)에서 수입하여 내과 소아과는 물론 외과 안과 등도 서양의학 혜택을 받고 있었으며, 따라서 동양에서는 지금처럼 최첨단을 걷는 의학수준의 나라였다. 개화기 훨씬 전의 이야기다.

원래 옛 일본도 조선과 같이 쇄국주의 나라였다. 그러나 조선과 다른 점은 '나가사끼'라는 조그만 자유항을 개항하여 그곳에서 선교에 관심 없는 외국인 화란과 무역을 했으며 그곳을 통하여 서방세계의 학문과 정보를 얻고 있었던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의 500년이 캄캄한 상자 속에 갇힌 시기였던데 비해, 쇄국일본은 나가사끼라는 바늘구멍을 통해서 상자 속에 바깥세계의 햇살이 가냘프게나마 들어오던 나라였다. 그래서 일본의 선구자들은 이 바늘구멍 빛을 통해서 개화에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끈질긴 노력을 했으며, 여기서 생겨난 학문이 다음 말하려는 일본의 란학(蘭學) 즉 네덜란드 학문이다. 그런데 캄캄한 나라 조선서 온 외교관인 연암이 란학과 접할 수 있는 길은 란학의 중국번역서를 찾아 암중모색하는 일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400년 전(서기 1600년) 유럽의 신흥국가인 홀랜드의 상선이 일본의 나가사끼 항구에 입항했으며 그곳에서 무역관 설치허가를 받았다. 마치 북한이 선봉지구를 개항하는 격이었다. 그래서 서양의 문물을 알고자하는 많은 지식층인사들이 외국어(화란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신학문에의 붐이 일어났다.

여기서 화란어 공부를 막 시작한 의사(한방의) 몇 사람이 서양책 '해부학도본'에 나온 인체해부도 그림을 보고 감동했다. 일본 란의의 선구자인 수기다(杉田玄白)라는 한의는 우연한 기회에 사형수의 시체해부에서 보여준 실물과 '화란 해부학 그림'이 완전 일치함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화란어를 학습하는 몇 동료와 뜻을 같이하여, 가진 고생 끝에 사전이나 전문가의 도움 없이 해부학 도본을 번역해서 해체신서(解體新書)란 이름으로 책을 간행했으니 1774년의 일이다.

이때 조선은 신학문은 커녕 고루한 유학자들의 4색 당쟁시대였는데, 여기서 일본인의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해체신서'의 출현은 일본의 '란학', 그 중에서도 '란의학'의 효시라 하겠다.

옛 중국 한의학은 '음양오행설'에 의거하며, 인체의 내장은 '오장육부' 밖에 없다고 했다. 한의학은 관념의 학문이었고, 한의사는 의사가 되기 전에 유교의 '음양설'부터 마스터해야 했다.

란의학의 출현(1774년)이래 일본의 많은 재래의(한방의)들은 관념 아닌 사실, 즉 과학을 추구하는 란의로 개종했다. 개화기 이전에 이미 여러 명의 네덜란드 의사들이 일본의학 교육에 관여했던 사실도 특기할만하다. 그래서 1858년 동경에 란의의 관립의학교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2백 몇십년전 '란의학'으로 일본 땅에 서양의학의 틀을 잡은 그들은, 명치유신이후 독일의학으로 변신해갔다.

그후 일본정부는 국민의 보건담당을 '서양의 일변도'로 몰아갔던 것이다. 근대화 국제화의 길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즉 1875년 제정된 의사국가시험 과목이 전적으로 서양의학 일색이 됨으로서, 한방의는 기득권만 인정받아 개업하는 불안한 존재가 되었다. 의사시험도 국가시험으로 통일했다. 유일한 한방의학교도 1883년 의료법개정으로 문을 닫게되었다.

여기에 한방의는 전국적으로 결속하야 정부의 서양의 편중정책에 저항해 봤지만, 국민보건 근대화에의 의지가 굳은 정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한방의의 최후의 로비이자 필사적인 청원으로 1895년 '한방의 존속안'이 국회에 상정되었건만 부결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장래를 위하는 그들 국회의원들은 어떤 나라 의원들처럼 로비에 현혹되지도 않았다. 그 결과 합법적인 한방의는 19세기에 일본서 영원히 자취를 감춘 셈이다. 이러한 결과는 조국의 과학입국과 국제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 보건향상을 위한 신념 굳은 정부지도자와 실무자들, 로비에 흔들리지 않고 공부하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국민을 계몽하고 정부를 설득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의료계지도자와 의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과학적인 의학(란의학)으로 씨뿌리고 뿌리내린 일본의학은 그후 독일의학, 미국의학으로 접목되어 현대의학이라는 거목으로 자랐으니 그 혜택은 바로 국민이 차지한다. 일본이 건강수명 최장수국이 된 연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일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일본의학은 탄탄대로에 놓여있다고 할까!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밀릴세 잎이 무성하고 백화만발하기 때문이다. 몹시 부러운 일이다.

200여년 전 우리의 선현 연암 선생은 캄캄한 쇄국 조선의학의 후진성을 한탄하며 낯선 중국 땅에서 야만국 일본의 란의학에 주목하야 그것을 찾아 암중모색하였으니, 국민보건 백년대계를 염려하며 조국근대화에 공헌하고자 했던 그 애국심에 우리는 다만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오늘의 의료대란을 예방하려는 선견지명을 지녔던 우리의 선현 연암 박지원 선생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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