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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8 19:59 (일)
[집중취재]주 5일제시대 그늘에 가린 전공의

[집중취재]주 5일제시대 그늘에 가린 전공의

  • 최승원 기자 choisw@kma.org
  • 승인 2004.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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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0시간 '그림의 떡'
"96시간만이라도..."

과로, 환자생명 위협…사회적 관심 속 논의돼야


한주에 40시간만 일하자는 '주 5일 근무제'가 1일 시행됐음에도 불구하고 한 주에 96시간은 일해야 한다는 발칙한 주장을 펴는 단체가 있다. 바로 이 단체가 대한전공의협의회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5월 열린 '전공의 노조포럼'에서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을 한주에 96시간 이하로 제한하자는 요구안을 담은 '전공의 수련환경 및 처우개선을 위한 요구안'을 발표하고 주 40시간 근무제의 시대적 흐름에 본격적으로 역행하겠다는 의지(?)를 공식 천명했다.

주 5일 근무제 시행으로 주 40시간 노동이 법제화돼 시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보다 두배가 넘는 96시간을 주당 근무시간으로 요구하고 나서는 한국 전공의들의 처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열악하다 못해 비인간적이다.

또한 한국 노동자의 노동환경이 지난 40여년간 꾸준히 개선된 것에 비해 전공의들의 노동환경은 아직 '1960년대 새마을 운동'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에 전공의 관련정책에 관여하고 있는 관계자들은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는 현 상황을 계기로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본격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전공의들의 과로가 곧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선진외국의 연구사례를 볼때 전공의들의 적정한 노동시간은 전 사회적인 관심속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것이 많은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주당 100시간 이상 노동

전공의들의 적정한 근무시간은 주당 몇 시간인가?
지난 5월 전공의협의회는 전공의 노조포럼을 통해 우선 전공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을 96시간으로 제한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당초 96시간과 100시간 두가지 입장을 두고 전공의협의회 집행부들간에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96시간이 결정됐다. 전공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을 96시간으로 정한 것은 전공의들의 근무시간 요구안 중 하나인 당직근무를 16시간으로 제한하자는 규정이 기준이 됐다.

일주일을 주 6일 근무로 치고 당직을 1일 최대 16시간으로 제한할 경우 한주에 전공의가 최대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96시간이라는 얘기다. 이는 일반적으로 노동자가 한 주에 근무할 수 있는 시간을 산정하고 적정한 1일 근무시간을 나누는 것과 달리 1일 근무할 수 있는 최대시간을 도출해 이를 한주당 노동시간으로 역순한 것이다.

말그대로 적정한 노동시간이라기 보다는 노동자가 하루에 연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최대 시간들의 합인 셈이다. 그럼 왜 전공의들은 적정한 노동시간을 산출하기 보다 근무가능한 최대 노동시간을 요구안으로 삼았을까?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많은 전공의들이 주당 100시간을 넘게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업무제한 가이드라인을 만들다 보니 무턱대고 이상적인 주당 근무시간에만 메달릴 수 없었다는 얘기다.

4시간 수면 '건강 최악'

전국에 있는 전공의 1,808명을 대상으로 올해 초 전공의협의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전공의의 절반(51.4%)이 주당 100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으며 조사대상 전공의 10명 중 3명(30%)은 120시간 이상, 심지어 조사대상 전공의의 6.8%는 140시간 이상을 근무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140시간 이상 근무는 일주일 중 하루도 쉬는 날이 없으며 매일 4시간씩 잠만자고 나머지 시간 전부를 업무에 할애할 때만 가능한 살인적인 근무시간이다.

또한 이번 조사에 응답한 전공의 중 주 5일 근로제에 해당될 수 있는 주 40시간 이하를 근무하는 전공의는 한명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당 평균 근무시간뿐 아니라 야간당직 근무 회수도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주당 야간 당직을 3회 이상 하는 전공의가 전체 조사자 1,932명 중 63%이며 전공의 4명 중 1명은 주당 5회 이상 야간 당직근무를 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5.5%는 주당 7회 당직근무를 선다고 답해 주 5일 근무제 시행에 따른 전공의들의 상대적인 박탈감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까지 침해받고 있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전공의들의 건강상태는 최악이고 의료사고의 위험성도 항상 도사리고 있다.

당직근무 중 과로로 쓰러지기도

서울소재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전공의는 "의국원 중 매년 당직근무를 서다 과로로 쓰러지는 전공의가 한명씩은 꼭 발생하고 있으며 근무하다 내과 외래진료실에서 수액 맞고 가는 것은 별 얘기꺼리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최근에 전공의 생활을 마치고 개원한 한 개원의는 "전공의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의료사고가 분명히 발생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의료사고의 경우 의국 밖으로 얘기가 쉽게 돌 수 없고 과로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부주의해 발생한 것인지 규명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우리에게 아직 없기 때문에 의사의 과로로 인한 의료사고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것이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미 "전공의 건강은 곧 환자 안전"

전세계적으로 수련의 신분인 전공의의 수련과 업무강도는 타업종에 비해 공통적으로 매우 높으며 대부분의 나라가 전공의의 업무시간을 제한하는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수련의의 주당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어 수련의들을 과도한 노동으로 부터 보호하고 과로에 의한 의료사고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 의사들의 수련업무를 담당하는 ACGME(Accreditation Council for Graduate Medical Education)가 지난 2003년 7월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Duty Hour Guideline'이 바로 그것인데 이 규정은 한국과 같이 특별한 전공의들의 근로 기준이 없는 국가들에게 자국 전공의들의 근무강도를 비교할 수 있는 매우 요긴한 바로미터로 채택될 수 있다.

우선 ACGME는 전공의들의 적정한 주당 노동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4주를 한단위로 해서 평균 주당 적정시간을 도출하고 있는데 특이할 점은 이 주당 80시간의 노동시간에 'clinical activities'와 'academic activities'를 같은 비중으로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전공의들이 학회관련 행사나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수련병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에 비해 미국은 학술 활동을 전공의 근무시간으로 정례화해 전공의들의 피교육자로서의 신분과 노동자로서의 신분을 동시에 보장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전공의들이 피교육자적 신분이라는 것을 들어 적절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강도높은 노동은 당연시 하는 우리의 정서에 반해 피교육자적인 신분을 우선시하고 이들을 적극 보호하려는 미국의사사회의 자세는 우리 의사사회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ACGME는 'Duty Hour Guideline'에서 "클리닉에서의 실무교육이 전공의 교육의 한부분이고 전공들에게 유익하다 해도 전공의들의 건강과 이보다 더 중요한 환자의 안전에 부정적이 될 수 있다"는 문구를 명시화한 것은 전공의 처우문제에 무관심한 우리 의사사회에게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의사의 노동가치 얼마인가?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최근 들어 미국에서 실시 중인 'Duty Hour Guideline'을 참고삼아 전공의들의 적정 주당 요구 근무시간을 96시간에서 80시간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지난 5월 주당 적정 근무시간을 96시간으로 정한 것에 대해 주 5일제 시행과 주 40시간 근무 등이 이슈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96시간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회원들의 의견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요구안은 법적 구속력 보다는 선언적 의미가 강한 것이어서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더라도 주당 80시간 근무를 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내부 여론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전공의들의 절박한 처우개선 의지나 노동환경 개선의지가 전공의협의회만의 움직임만으로는 어림없다는 거다.

우선 의사사회에서 전공의들의 살인적인 노동환경이 이슈가 돼야 하는데 각종 의료계의 급박한 이슈들에 비해 전공의의 문제는 여전히 조명을 받지 못하는 사안이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을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미국이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이 미국 시민단체들이 의사의 과도한 업무량이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근무제한 규정이 만들어진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의사의 업무량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나 시민 사회단체들의 관심은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노조설립 및 병협 공공기구에 기대

임동권 전공의협의회장은 이런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며 결국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공의 노조의 설립에 기대를 걸고 있다. 전공의협의회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고 법적으로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보장된 만큼 일정한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노조설립은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벌써 전공의노조 설립을 선언한 이후 전공의 신임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병협과도 전공의 처우개선을 위한 공감대 형성과 공동대책기구 설립합의 등의 일정한 성과도 가시화되고 있다.

주당 100시간이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전공의들은 최근 쟁점이 된 주 40시간 근무제 시행을 보며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더욱이 1일부터 일부 병원들이 40시간 근무제로 바뀌면서 전공의들의 업무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전 사회적으로 주 40시간 근무가 시행되고 'well-being'이 시대적 흐름으로 각광받는 이때 전공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에 대한 논의는 그래서 더욱 절박해 진다. 또한 전공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에 대한 논의는 곧 젊은 의사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의사들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를 이슈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사사회의 관심이 절실히 요구된다.

최승원기자 choisw@k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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