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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혈우병 환자 진료비 삭감 논란

[기획]혈우병 환자 진료비 삭감 논란

  • 이정환 기자 leejh91@kma.org
  • 승인 2004.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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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진료가 삭감…있을 수 없는 일"


최근 경희의료원에서 40일 동안 진료를 받은 혈우병 환자 진료비가 무려 10억2,000만원이나 됐고, 이에 대한 진료비 삭감도 2억6,000만원 규모여서 화제가 되고 있다.
단 시일 내에 한명의 환자에게서 발생한 진료비로는 최대액수를 기록했으며, 진료비 삭감액도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이어서 언론에서는 연일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병원에서 의사들이 최선의 진료를 해서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는 했지만 비현실적인 심사기준 및 식약청이 정한 잣대로 진료비를 삭감하다보니 병원의 피해가 너무 컸다는 점이다.
위의 사례는 진료현장에서 흔히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세부적인 심사기준 조차 마련돼 있지 않아 의사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만약 식약청에서 허가한 대로, 그리고 심사평가원에서 마련한 심사기준대로 환자를 진료했다면 어떠한 상황이 발생했을까?
그런 기준에 따라 진료를 했다가 의료사고가 발생했다면 당연히 병원과 의사에게 책임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의사가 소신껏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소신대로 진료해 다행히 환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도 과다진료를 했다는 이유로 진료비를 삭감당하는 불이익을 피해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희귀·난치성 질환자들에 대한 진료비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고는 하나, 정작 진료현장에 돌아오는 지원금은 전무한 상황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심사기준이 빨리 마련돼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10억2천 진료비 어떻게 나왔나?

2년 8개월 된 혈우병 환자 박 모군(14kg)은 8인자와 9인자에 대한 고농도의 항체를 갖고 있는 아주 드문 상황에서 장중첩증으로 두 번에 걸친 장절제 수술을 포함해 40일간 입원진료를 받았다.
1세 전후의 소아에서 자주 발생하는 장중첩증은 상부의 장이 하부의 장으로 말려 들어가는 질환으로 일반적으로 작은 창자의 끝 부분에서 시작해 작은 창자의 대부분이 큰 창자 속으로 말려들어 가면서 급격한 통증과 구토 및 혈변을 유발한다.
24시간 이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장이 꼬여 피가 통하지 않아 썩거나 탈수, 출혈에 의한 쇼크에 빠지게 된다. 치료방법으로는 응급으로 X-선 투시하에 바리움 관장을 시도해 대부분 좋은 결과를 보지만,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배를 열고 손으로 풀거나 심한 경우 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시도한다.
박 모군도 입원 당일 2번의 바리움 관장을 시행했으나 실패해 결국에는 장절제술을 시행하게 됐다. 그러나 경희의료원에서는 고농도의 항체를 갖고 있는 혈우병 환자인 점을 감안, 고가의 '노보세븐'을 투여하는 등 적절한 진료를 시행했다.
그런데 2일 후 계속적으로 장이 붓고 출혈이 있어 재수술을 시행하게 되었으며, 장기입원을 하게 됐고, 노보세븐이 장기적으로 대량 투여돼 10억원 이상의 진료비가 발생했다.
 
최선의 진료 vs 과다진료

이와 관련, 경희의료원은 최선의 진료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심사평가원에서는 노보세븐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투여됐다며, 2억6,000만원의 진료비(약제비)를 삭감했다.
진료비를 삭감 당하자 경희의료원 J 교수는 "삭감을 당할 것은 예상했으나, 어린 혈우병 환자를 그대로 놔두면 관절이 망가져 장애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J 교수는 "피를 응고시키는 노보세븐의 경우 대상자의 10% 정도는 잘 듣지 않는데, 특별히 대체할 수 있는 약이 없기 때문에 식약청에서 허가하고 있는 기준보다 조금 더 투여할 수밖에 없다"며, "노보세븐을 사용해도 사람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등 여러가지 변수가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기준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진료비를 무조건 삭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번 사건의 경우 의료진도 처음에는 심사평가원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준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보다 값싼 약을 사용했으나 피가 멈추지 않아 노보세븐을 사용하게 됐다"며, "의료진에서 만약 노보세븐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경희의료원의 입장과는 반대로 심사평가원은 "모든 환자의 진료기록을 살피고, 안전성·유효성에 대한 식약청 허가사항, 고시, 심사지침 등을 통해 의약학적 타당성과 비용효과성을 바탕으로 진료비를 삭감한다"며,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심사평가원은 "의료진의 최선을 다해 진료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식약청에서 허가한 사항을 근거로 했을 때 분명히 초과해서 사용한 부분이 있었다"며, 그만큼만 진료비를 삭감했다고 밝혔다.
 
식약청 허가사항 외 세부기준 없어

심사평가원의 주장대로라면 현재로서는 식약청에서 허가한 사항 이외에는 심사기준에 관한 뚜렸한 세부내용이 없다. 그렇다보니 전문가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기준에만 충실한' 심사를 할 수밖에 없다.
경희의료원 J 교수는 "지난 1991년부터 혈우환자 전문병원으로 지정돼 혈우병 환자를 치료해 왔으나, 그만큼 막대한 삭감을 감수해왔던 것도 사실"이라며, "정부에서 특별한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삭감을 견디지 못해 지난해 11월 혈우병 환자 지정병원 취소신청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J 교수는 "진료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 큰 문제이므로 의사들과 심사평가원 관계자들이 모여 가이드라인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J 교수는 "합리적인 기준을 찾아 융통성을 부여해 진료현장에서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비현실적 기준 때문에 환자가 최선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심사평가원 기획심사위원실 한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세부기준이 없어서 식약청 허가사항이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는 답변만 했다.
이 관계자는 또 "노보세븐의 경우 향혈우인자로 치료해도 안될 경우 사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경희의료원에서는 용량을 초과해 삭감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자문회의 어디까가지 믿어야 하나?

이번 사건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자 심사평가원은 "특별한 상황이었던 만큼 외부 전문가 자문회의를 충분히 거쳤다"고 밝혔다.
심사평가원 L 심사위원은 "박 모군의 사례는 처음 있는 일로 진료비를 심사할 당시 소아과 분과위원회, 혈우병 관련 전문가 및 관계자들과 여러 번 만나면서 의견을 수렴했다"고 말했다.
L 심사위원은 "심사기준과 관련해서는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경희의료원이 이의신청을 제기하면 충분히 재검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사평가원 해명에 대해 의협 한 관계자는 "진료심사평가위원회에서 의학적 타당성 등을 검토하고, 전문가들의 의견도 충분히 들었다고는 하지만 의료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 관계자는 "아직도 심사평가원은 건강보험재정에만 중점을 둔 심사를 하고 있다"며, 근본적인 자세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지난해 심사평가원과 혈액학회 관계자들이 혈우병 환자 진료비용 등에 대한 자문회의를 갖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진료비는 여전히 삭감되고 있다"며, "자문회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정부지원 부족…지정병원은 탈퇴 고려

정부는 지난해 11월 희귀·난치성 질환자에 대한 국고지원을 70억원 가량 늘려 총 지원 예산을 333억원 정도로 확대됐다.
정부가 지원하는 의료비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 항목에 한해 환자가 부담하는 진료비(전체의 20%)이며, 보험이 안되는 비용은 제외된다.
그러나 정부의 국고지원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혈우병 지정병원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전무한 상황이다. 혈우병 환자들에 대한 의료비 지원은 있을지 몰라도 지정병원은 진료비 삭감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경희의료원 원무부 관계자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혈우병 관련 삭감액은 총 10억원 정도이며, 지난해 진료액 중 23억원 정도가 심사에서 보류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따라서 현재 혈우병 환자 진료 지정병원으로 되어 있는 서울대병원, 연세의료원, 적십자병원, 경희의료원, 한양대, 충남대 병원 등은 불만이 많은 상태다.
혈우병 환자 지정병원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혈우병 환자들의 어려움 때문에 마음대로 지정취소를 하지 못하고 진료비 삭감도 감수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태"라며, "정부의 대응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대안책 빨리 내놓아야

한국혈우재단 관계자는 "제도 때문에 환자들이 최선의 진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심사기준 등이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무리한 진료비 삭감 등으로 인해 지정병원의 고통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혈우병 환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며, 정부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혈우재단에 등록된 환자는 1,665명이지만, 학계 추산으로는 경증환자까지 포함하면 최대 4,000여명에 이른다"며 "불합리한 제도개선으로 이들이 모두 제대로된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는 결국 건강보험재정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선의 진료를 해도 이를 삭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때문에 초래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건강보험재정에서 이 문제를 꼭 해결할 필요는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들에 따르면 특별 재정지원책이 마련되면 지정병원도 진료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 진료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 및 심사평가원은 국고지원을 늘리는 방안은 물론 지정병원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등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또한 비현실적인 심사기준은 물론 식약청 허가사항의 문제도 개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의사들은 최선의 진료를 하면 '무지막지한 삭감폭풍'이 닥칠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를 포기할 수 없다. 하루빨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가이드라인)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이정환기자 leejh91@kma.org/이현식기자 hslee03@k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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