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기억
세상의 많은 영혼들이 사라져간 행간行間에
꽃은 닻을 내리고 기적汽笛을 울린다
피아노 위에 꽃병이 놓여있고
꽃병에서 자라난 나비가 건반 우에 앉아 팔랑인다.
이끼가 물고 있는 물기가 글자가 되어 걸어 나온다.
문장들 사이에 떠있는 꽃은 미지의 대륙을 향해 출항할 채비를 한다.
나비가 두드린 음률이 푸른빛을 낸다.
게아재비가 밤의 표면을 미끄러져 간다.
창밖에는 얼음광장을 잊기 위해 바람이 불고
식탁 위에는 책이 있고
이야기가 만든 꽃은 시들어가고
항간에 떠돌던 소문이 밤을 밝히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들어 식탁 위는 소란해지고
꽃이 침묵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어색해지고
침묵이 더 큰 소리라며 달아나는 한낮의 정적靜寂이
산딸기처럼 빨갛게 익어가고
꽃이 닻을 올리고 떠나간다는 사실도 신가한 기류氣流처럼 여겨지는
책 안의 글자들이 꿈 조각들을 들고 기어 나와 꽃을 바라본다.
서로에게 익숙해진 기억들이 눈송이처럼 쏟아진다.
사라질 구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오후 아홉시 티브이 뉴스가
난파한 꽃의 실종자 구조상황에 대해 생중계를 한다.
부산 김경수내과의원장/<현대시> 등단(1993)/시집 <하얀 욕망이 눈부시다> <다른 시각에서 보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달리의 추억> <산 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시와사상>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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