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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뱉은 침 맞고는…내가 왜?' 생각 문득"

"환자가 뱉은 침 맞고는…내가 왜?' 생각 문득"

  • 이은빈 기자 cucici@doctorsnews.co.kr
  • 승인 2013.12.03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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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현장 폭행에 반기 든 서곤 대전협 복지이사 "기본인권은 보장돼야"

"당직 끝나고 바로 왔어요."

한 주를 여는 월요일 아침, 운동복 차림의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청년이 들어섰다. 일요일 오전부터 꼬박 24시간을 중앙대병원 응급실에서 보낸 그는 "씻을 시간이 없었다"며 텁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감지 못한 머리를 멋쩍어했다.

지난 5월 술에 취해 병원에 실려 온 남성으로부터 난데없이 폭행을 당하고, 최근 법정공방 끝에 500만원에 달하는 벌금형을 이끌어낸 서곤 대한전공의협의회 복지이사를 2일 대전협 사무실에서 만났다. 응급의학과 2년차 전공의인 그의 삶은 사건 전이나 후나, 진료 최일선에서 환자와 호흡하고 있다는 점에서 달라진 게 없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본인 요청으로 사진을 게재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의 양해바랍니다(편집자 주). 

전공의들이 폭행당하는 일은 빈번하지만, 법적으로 정면 대응하는 과정을 실명으로 알린 사례는 흔하지 않다. 나서기까지 결단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 올 8월 한 레지던트가 공개한 응급실 폭력장면.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응급실에서 진료 중인 의사를 향해 의자를 집어던지는 영상이 공개돼 의료계에 충격을 줬다. (사진=동영상 화면 캡쳐).

인턴 때 불합리한 일이 있어도 꾹 참으면서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대응한 건 수련을 시작한 작년부터다. 내 환자를 진료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의 폭행이나 폭언을 당하면 무조건 경찰을 불러 해결하고자 했다.

병원에서 보통은 조용히 넘어가자는 분위기라 처음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하니 주취자가 난동을 부리는 건수가 차츰 줄어들더라. 강력하게 대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만큼의 예방 효과가 있다. 법정에 가서 증언까지 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전부터 적극 대응해온 것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된다.

의료현장에서 느끼는 폭행의 심각성은 어느 정도인가.
작년에 진료 도중 환자가 내 얼굴에 침을 뱉은 일이 있었다. 만취해서 실려 온 중년남성이었다. 흉통이 있어서 심전도 검사를 받으셔야 할 것 같다고 하니까, '자기 몸은 자기가 더 잘 안다'면서 집에 간다고 하는 거다. 대뜸 욕설과 함께 침을 맞고는, 참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도 응급의료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요즘 같은 연말은 또 '술자리 특수'로 사건사고가 유독 많다. 명절이나 연말은 응급실이 가장 정신없는 기간이다. 가족폭력을 목격하고, 의료인으로서의 의무로 신고해도 당사자의 어머니가 신고를 취소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취소해준 경험도 있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는데, 신고자가 취소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건가. 불합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응급의학과를 택하고 후회도 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응급상황에서 환자를 살리는 보람을 떠올려본다면.
이유 없이 당하는 폭행의 순간들은 치명적인 모욕감과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준다. '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한순간 멍해진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데,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는 풍토가 조성됐으면 한다. 날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지 않나.

당직서면서 정말 힘들 때가 있다. 중상환자가 실려와 밤새 긴장하면서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는데, 내 체력이 바닥이 날 때쯤 환자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환자들이 응급실에 올 때는 의식이 없어서 그런 순간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처음에 응급처치 잘하고, 다음날 수술이 잘 돼서 퇴원하면 뒤에서 뿌듯한 직업이 응급의학과 의사다.

폭행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전공의협의회 차원에서 프로토콜을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까지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은.
경찰에서 공식마크를 쓰는 일만 허락 받으면 이번 주 안으로 배포할 계획이다. 대전협 취임 때부터 약속했던 사안으로, 필요한 증거자료를 확보하는 방법과 경찰에 사건을 접수할 때 밝혀야 할 사항을 명시해 당황스런 순간에도 쉽게 따를 수 있도록 제작했다.

폭행을 당한 전공의는 프로토콜에 따라 112 신고하고, 증거자료를 확보해 형사과에 사건을 인계하고, 대전협에 민원을 접수하면 된다. 그 뒤부터는 복지이사인 내가 직접 출동해 도움을 주고자 한다. 전공의 회원들의 민원을 받다보면, 실제 문제가 해결되는지 여부보단 지방까지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화해주는 것에 고마워하는 경우가 많다. 동료의사들이 소신껏 진료할 수 있도록 아낌 없이 지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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