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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문화의 밤'과 기억력

청진기 '문화의 밤'과 기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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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28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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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인하의대 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 황건(인하의대 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내가 20 여 년 전 전문의를 받을 때에는 회원의 수가 300여명에 지나지 않아서 회원명부를 들추어 사진을 보면 거의가 한두 번은 뵌 적이 있는 선배 회원들이었는데, 이제는 회원도 2000여명이 넘게 증가했고, 나의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아 학회에서 눈인사를 나누고도 뒤돌아서면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다.

성형외과학회 회원의 대다수가 개원 회원으로 성형외과의사회(의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회원의 친목을 위해 해마다 골프대회를 열어왔으나 이번에는 '성형외과의사 문화의 밤'이라는 음악회를 열어 회원들과 병원직원, 가족들을 초대했다. 나는 봉직회원으로서 의사회에 가입하고 있지 않아 개원회원들과 친목을 나눌 기회가 적었으나 이 음악회에 초대를 받아 관람하게 됐다.

음악회에 나선 연주그룹의 이름은 '이도'였다. 세종대왕의 함자인 '이도'를 따서 만든 것이지도 모르고 나는 전국시대 제나라의 재상 안자가 두 개의 복숭아로 세 장수를 제거한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의 '이도(二桃)'를 생각하고만 있었다.

이날 음악회는 유경화 씨(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가 이끌었는데, 철현금·대금·태평소·북 등 우리나라 전통악기와 드럼·콘트라베이스·베이스기타 등의 소리가 어우러진 국악과 재즈가 화음을 이뤘다.

유경화 교수의 복장은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가 입었던 검은 복장으로, 하얀 얼굴이 조명을 받아 더욱 창백해 보였으며, 일벌을 거느리는 여왕벌 처럼 보이기도 하고, 철현금이 대금이나 태평소와 어우러질 때는 귀기(鬼氣)가 느껴지기도 했다.

첫번째 곡 '망각'을 들을 때는 싱클레어에게 "새는 알에서 나온다. 한 세상이 시작되려면 한 세상은 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데미안이 생각났다. 곡의 마지막에 고수가 흰 부채를 퍼덕여 새의 날개소리를 내자 나도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큰 산과 흐르는 물을 떠올리던 종자기가 된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졌다(伯牙絶絃).

다음 곡 '용감한 달빛'을 들으며 나는 만해의 '거문고 탈 때'를 떠올렸다.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첨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 줄 위에서 그네를 탑니다…"

현의 수는 거문고 보다 하나 많은 여덟 개의 쇠줄 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얼굴 흰 여인이 달빛을 받으며 그네를 뛰고 있었다. '마지막 소리가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나도 아득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명창 임현빈씨가 백선을 펼쳐가며 사철가 흥타령, 강원도아리랑을 부를 때는 객석에서 추임새를 기대했으나 그리 어우러지지는 못했다.

공연이 끝난 뒤 맥주잔을 기울이며 감동을 나눌 때, 호남 출신의 한 회원이 아쉬운 듯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생신 때는 집에 소리꾼을 부르곤 했어요. 그때는 마당에 둘러앉았으니 소리꾼과 우리가 하나된 것 같아서 추임새도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오늘은 무대와 객석사이가 멀어서…."

다른 회원도 한마디 거들었다.

"200명이 들어가는 이 정도 무대이면, 철현금에 꽂혀있는 '잭'을 빼고 마이크 없이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는데…."

'문화의 밤' 행사에 다녀와서 회원명부를 꺼내 사진을 보며 어제 만났던 젊은 의사들의 이름을 외우려 몇 번씩 중얼거렸다.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기억해 먼저 말을 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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