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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현악 사중주 14번

청진기 현악 사중주 1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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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9.3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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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인하의대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 황건(인하의대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나는 박스오피스 상위에 있는 코메디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의사결정에서의 비중이 커진 아내는 '현악 사중주(The late quartet)'라는 영화를 보겠다고 한다. 음악회에 가 본지도 여러 해가 지났는데 또 졸다오겠구나 하며 묵묵히 따라 들어갔다.

무대에 네 명의 현악기 연주자가 앉아 있는 첫 장면으로 시작하고, 그 중 한명이 바뀐 네 명의 연주자가 연주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결성 25주년 기념 공연을 앞둔 4중주단에서 다른 단원보다 나이가 많으며, 멘토 역할을 하던 노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병으로 인해 4중주단이 깨질까 염려하던 그는 이번 공연을 자신의 마지막 무대로 하겠다며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연주할 것을 제안한다.

작품번호(Opus) 131인 이 곡은 7개의 악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 악장이 연결돼 있어 연주자들은 중간에 쉬지 못하고 연주해야 한다.

노 첼리스트는 자기 대신 나머지 3명과 호흡을 맞출 젊은 첼리스트를 구해 연습시켰다. 공연은 이전과 같은 연주자들로 시작돼 6악장까지 마쳤다. 쉼 없이 연주해야할 마지막 7악장 직전에 연주는 멈춰지고 노 첼리스트는 첼로를 바닥에 눕혀놓고 일어나 말했다.

"이 곡은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하는데 이제 저는 그럴 기력이 없군요."

청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는 객석에 들어와 앉아 경청하며 미소를 지었다. 후임 첼리스트를 포함한 네 연주자들은 6악장의 마지막 소절부터 다시 시작해 7악장을 연주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서 끝날 때 까지 일어서려는 이들이 없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는 유튜브에서 그 곡을 찾아 들어보았는데, 꼭 일주 일 뒤에 그 영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이신 백상호 선생님과 문하생들이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선생님과 사모님이 새 한복을 입으신 것이 잘 어울렸다. 선생님은 20년 전 회갑 때에도 해부학교실원들과 문하생들에게 부담주지 않으시려고 회갑연 대신 제자들을 초대해 한 끼의 저녁식사를 나누신 분이었다.

제자들이 명절 때 댁으로 찾아뵈려 하면 행여 부담줄까 피하시며 못 오게 하셨는데, 정년퇴임 후에는 스승의 날이 들어있는 5월에 일 년에 한 번씩만 문하생들을 만나셨고, 비용도 대부분 선생님이 부담하셨다.

모임에서 문하생들이 근황을 이야기했다. 가천대 이봉희 교수는 단백질을 특수 염색해 세포 속 암의 진행 단계를 손쉽게 판별하는 분자 진단법을 개발해 그 결과를 국제 유전체학 전문지 <게놈 리서치(Genome Research)>에 실었다고 했다.

백 선생님은 경상의대 초대학장을 4년간 맡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는 서울의대로 돌아오셨는데, 경상의대가 올해 개교 30주년을 맞았다. 학장을 역임한 1회 졸업생 조경제 교수는 기념식에 백 선생님을 초청했다. 정구보 교수는 백선생님을 대표저자로 한 해부학 교과서를 집필중이라고 했다.

참석한 대부분의 제자들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일취월장하는 이야기를 경청하는 스승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내 차례가 왔다.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나는 그 영화이야기를 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한 오백년'을 숨차도록 불렀다.

"뒷동산 후원에 다아안을 모오고 우리 선생님 만수무강을 빌어나 보오자 그러면 그렇지이 그렇고오 마알고 한오백년 살자 느은데에 외엔 서엉화아요"

분위기는 올라 술잔은 돌아가는데, 연로한 스승은 제자들을 일어나지도 못하게 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셨다. 얼큰히 취한 제자들이 계산대를 찾았을 때는 스승이 이미 제자들 숙소 비용까지 지불하고 귀가하신 뒤였다.

집에 돌아오며 영화 속 노 첼리스트와 노 교수가 자꾸 오버랩되며, 내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정년은 10년이 채 못 남았다. 지금은 주임교수로서 과를 이끌고 있고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지만, 나도 그 첼리스트처럼 나의 지도교수님처럼 내가 몸담았던 곳을 발전시키는 밑거름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떠나고도 객석에서 후학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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