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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아빠가 되어서도…

청진기 아빠가 되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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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9.0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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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 재(경기도립파주병원 응급의학과 )

▲ 최석 재(경기도립파주병원 응급의학과 )

한 아이의 아빠가 된지 벌써 3년,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말도 시작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아이와의 에피소드가 하나둘 늘어가는 재미가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아빠가 됐으면서도 아들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다른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확장 공사 중이라 소음이 심한 응급실에서 밀려드는 환자들을 보느라 점점 지쳐가는 평일 저녁 늦은 시간, 젊은 할아버지 정도로 보이는 보호자 한분이 명료하고 건강해 보이는 5세 남아와 함께 응급실로 들어왔다.

보호자는 아이의 아빠라 했고 어찌 오셨는지 물으니 아이가 자동차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있던 중 차량 정체로 안전벨트를 풀렀다가 앞차량의 급정거에 차량이 부딪히면서 아이 머리가 유리에 부딪혔고 유리에 금이 갔으며 이후 내원 직전 구역질을 한번 했다고 말했다.

아이는 특별히 이마에 부종이나 상처는 없었고 응급실에서는 특이 증상을 호소하지 않았으며 잘 놀고 있었다. 하지만 구역질이 있었다 하고 유리가 깨질 정도의 둔상이 있었다고 하니 의료진 입장에서는 괜찮다고만 할 수도 없는 일….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환자가 오면 으레 검사를 과하게 요구하거나 입원을 시켜달라고 조르는 일이 많아 이런 경우 괜찮아 보이는데 보호자가 사고를 과장하면서 데려온 게 아니냐는 선입견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 같다. 일단 교과서적으로는 머리 CT를 확인하는 게 원칙이니 걱정되면 아이를 재우지 않고 CT 촬영을 시도해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잘 노는 아이가 무슨 이상이 있겠어? 입원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후 밖으로 나가 한동안 몇 통의 전화를 하더니 CT를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아마도 보험사에 연락을 했나보다 생각하며 무심히 찍어보자고 하고는 다음 환자를 보느라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못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나 CT실로 아이가 출발한 뒤 잠시 후, 아이가 울면서 심하게 움직여 촬영을 못했다는 연락이 왔다. 보호자에게 그래도 CT를 확인하겠느냐 물었고 아빠는 아이를 재워서라도 CT를 확인하겠다 했다. 퉁명스레 '그럼 찍어봅시다' 하고는 시럽 수면제로 환아를 재우고 다시 CT 확인을 시도하기로 했다.

이후 다른 환자들을 보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던 중 한 시간여 뒤 아빠는 아이가 자지 않는다고 다시 나를 찾았고 두 번째로 약물을 추가 사용하기로 하고 원내약국에 연락,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아이는 잠이 들었고 CT실로 옮겨졌다.

다행히 어렵게 확인한 머리 CT에서는 특별한 뇌출혈 소견이나 골절 소견은 없었고, 깊게 잠든 아이 옆에서 늦은 저녁삼아 빵을 먹으며 기다리던 보호자에게 다가가 결과를 설명했다. 그러자 갑자기 드시던 빵을 문 채 엉엉 우는 게 아닌가? 전혀 생각치도 경험하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그제서야 난, 세 시간에 걸친 긴 시간동안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나하고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을지를 깨달았다. 그냥 '찍을테면 찍어라' 하는 무책임한 교과서적인 얘기만 해놓고 아이 아빠가 얼마나 걱정할 지에 대한 고려없이 큰 문제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그 흔한 얘기조차 하지 않고 사무적으로 환자를 본 것이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제서야 아이가 괜찮으니 다행이라고, 걱정 많이 하셨나보다는 얘기를 하고 아이가 깰 때까지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 지켜보다 깨는 것 확인하고 돌아가면 된다고 얘기하고 뒤돌아 나왔다.

한 시간여 뒤, 아빠는 집에서 할 일도 많고 아이가 밤늦은 시간이라 깨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데려가겠다 했다. 위험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다른 보호자는 오실 분이 없냐고 물으니 혼자 아이를 키운다고 했다.

집에서 할 일이 많아 도저히 병원에서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보호자에게 환아가 숨은 잘 쉬는지 확인하도록 교육하고 귀가시키기로 결정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돼서도 다른 아빠의 걱정을 이해하고 따듯한 말 한마디 할 법 한데 그런 세심함이 아쉬워 후회가 됐다.

하지만 오늘도 응급실에는 말짱해 보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입원을 요구하며 의사와 '협상'을 하려는 엄마아빠가 몇몇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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