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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착한 거짓말…그리고 남는 기억들

청진기 착한 거짓말…그리고 남는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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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1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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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주(세브란스병원 마취통증의학과 R1)

▲ 신명주(세브란스병원 마취통증의학과 R1)
오늘은 소아 환자의 수술이 있는 날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전처치실에 내려와 있는 아이를 만나러 갔다. 8살 남자아이. 엄마 품에 안겨서 신이 나게 놀던 아이는 내가 다가가자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아이 엄마에게 마취에 대해 설명하고 마취동의서를 받는 동안 아이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아이 곁을 잠시 떠나 수술방 준비를 한 후 이제 아이를 수술방에 데려가기 위해 다시 전처치실로 돌아왔다. 아깐 울상이었던 아이가 이젠 울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나 수술 안 받을래. 엄마, 그냥 병실로 올라가자"고 울며 소리 질렀다. 그러면서 엄마 품에 더욱 안겼다. 이런 아이들은 강제로 수술방에 데리고 들어가면 난리를 치기 때문에 보통 전처치실에서 약을 줘 살짝 재운 후 수술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엄마 품에 안겨 수술 안 받겠다고 우는 아이의 라인으로 잠자는 약을 주었다. 금세 아이는 졸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완강히 버텼다. 의식은 몽롱하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몽롱한 상태에서 아이는 계속 말했다.

"나 수술 안 받을 거야, 그냥 병실로 가자."

아이가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그냥 병실로 가겠다고 할 때 나와 수술과 의사,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는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그래, 오늘 수술받지 말자. 그냥 병실로 가자."

아이는 그럴 때마다 "진짜 병실 가는거죠, 수술 안 받는 거죠?"라고 되물었다. 아이에게 우리는 선뜻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응, 이제 병실 가는 거야"라고 말했다.

수술방에 도착해서도 아이는 계속 병실 가는 거냐고 물었고 우리는 그렇다고 답했다. 수술방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마취과 선생님께서 그 말을 듣고 내게 한마디 하셨다.

"왜 아이에게 거짓말하니?"

순간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릴 때 내가 가장 가기 싫어한 곳은 병원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다)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느니 차라리 지옥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예방접종이라도 맞으러 소아과에 가면 병원 건물이 무너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그 때마다 어머니와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이거 하나도 안 아파."

하지만, 아팠다. 아주 많이 아팠다.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없는데, 병원 가서 주사 맞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병원의 위치, 병원의 구조는 물론 의사 선생님은 어떤 옷을 입고 있었고, 그가 놓던 주사는 얼마나 아팠는지까지.

요즘 한창 인기 있는 예능프로그램에서 한 아이는 어릴 때 아버지가 자신을 실망하게 한 일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흔히 아이가 어려 나중에 기억 못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그것을 말하지 않고 담아두곤 한다.

어쩌면 어렸을 때 겪은, 지금 기억 못 하는 일들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아이에게 무심코 한 행동과 말들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짓지는 않을지, 어쩌면 쓸 데 없을지도 모르는 걱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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