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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금식의 추억

청진기 금식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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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2.1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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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 김애양(은혜산부인과의원)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왔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군대 간 애인을 면회 갔다가 그날 밤 덜컥 임신이 되었는데 도저히 낳을 수 없단다. 그렇게 창피한 일을 내게 말하는 친구가 신기하고도 내심 고마웠다.

단지 의과대학을 다닐 뿐인데 벌써 나를 의사로 인정해 주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녀가 내게 도와달라는 건 수술비의 융통이었다. 작은 출판사에 취직한 그녀의 월급날이 한참 남았다고 했다. 돈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비밀 결사 요원이라도 된 양 흥분에 싸여 선뜻 장담을 했다.

어머니께 원서를 사야한다는 거짓말로 쉽게 돈을 타내 친구를 따라 나섰다. 수술비만 꿔줘도 충분했는데 자청해서 보호자 역할까지 맡은 것이었다.

친구가 예약해 둔 산부인과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야 했다. 의정부 너머에서 군복무를 하는 애인에게 모쪼록 가까운 곳으로 정한 거란다.

그곳이 내가 가본 최초의 개인의원이었는데 대기실엔 불기 없는 연탄난로가 놓여 있을 뿐 환자가 없어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두터운 스웨터를 겹쳐 입은 간호사가 물었다.

"남자는 안 왔어요?"
그렇잖아도 내가 의과대학을 다닌다고 하면 우대를 해주려나 싶어서 입이 간지러운 중에 친구가 대신 답했다. 의대생인 이 친구가 보호자라고. 간호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계속 물었다.

"식사는 안했겠지요?" 이번엔 내가 얼른 대답을 했다.
"네, 밥은 안 먹었어요."

집에서 떠날 때 우리는 분식집에 들렀다. 친구가 너무 처져 보여 이유를 물었더니 이틀이나 굶었단다. 병원에서 마취를 해야 하므로 밥 먹지 말라고 했다며.

나는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며 기운이 없으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법이라고 우겼다. 그래서 밥은 먹지 말더라도 요기를 하자고 그녀에게 쫄면을 권했던 것이었다. 밥알은 자칫 곤두선다고 해도 국수야 졸졸 내려 갈테니 말이다.

친구가 수술실로 간 후 조금 지나서 간호사가 뛰어나왔다.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며 소리쳤다.

"이봐 학생, 금식시켰다면서?"
간호사는 씩씩거리며 나를 회복실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방바닥에 엎드린 친구가 쫄면을 죄다 토해 내고 있었다. 간호사는 나보고 책임지고 치우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토사물이 불결한지 어쩐지도 모르고 열심히 바닥을 닦아냈다. 그땐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게 급선무라 아무 생각도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병원이란 참으로 큰 권력을 가진 것 같다. 환자 뿐 아니라 보호자에게도 고압적으로 명령을 할 수 있다니…….

요즘도 수술을 앞두고 기운 내라고 잔뜩 밥을 먹고 오는 환자들을 볼 수 있다. 그때마다 옛 기억에 빙그레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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