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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감염환자 수술기피…명분 없다

HIV 감염환자 수술기피…명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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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9.0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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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신문 Cover Story를 읽고

▲ 이훈재(인하의대 예방의학교실 의료인에이즈교육센터)

8월 22일자 <의협신문>에서는 'HIV 감염 환자 수술기피, 의료인만 잘못?'이라는 제목하의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게재하였다.

'의사도 자신의 생명 보호할 권리 있어'라는 부제만으로도 취재의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실제 기사의 본문에서는 HIV 감염 환자의 수술을 기피한 어느 의료진의 행위가 관련제도 결함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안전과 건강은 의료인도 누려야 할 기본권리이며, 질 높은 의료서비스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사도 자신의 생명 보호할 권리 있어'라는 주장 자체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문제된 HIV 감염 환자 수술기피 사건의 본질을 논함에 있어서 의사의 안전과 건강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는 않는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옹호하고자 하는 일부 의료진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대다수 의료인들이 공감하고 있는 감성적인 주장을 억지 연결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의사를 옹호하는 것은 <의협신문>의 존재이유 중 하나이다.

이런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면 다소 무리하고 과격한 논리를 펼칠 수도 있을 법하다. 이를테면 의학적 근거가 조금 미약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의사 과오의 근본원인을 일단은 의료환경과 불합리한 제도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적 기본원리와 의사가 지켜내야 할 직업윤리의 근간을 벗어난 논리까지 동원해서는 안 된다.

지난해 12월, 서울 소재 A 대학병원 의료진이 HIV 감염 환자에 대한 인공관절수술을 기피하고 다른 병원으로 전원한 일이 있었다. 감염 예방용 특수 수술장갑이 없고, 담당 의사가 연로하여 면밀한 주의조치를 하기도 곤란한 것이 그 이유였다.

납득 못한 환자는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였으며, 당사자와 의료계 전문가 등의 참고진술을 토대로 부당한 진료 차별행위로 판정된 것이다.

A 대학병원에 대해서는 의료기관 차원의 재발방지 대책수립과 소속 의료인에 대한 환자 인권교육이 권고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진행이 A 대학병원 측으로서는 억울한 듯하다. 수술을 해주기 어려운 사정을 환자에게 설명하였고 환자동의 하에 다른 병원으로 전원한 것이라고 하소연도 하였다.

그러나 설사 환자의 자발적 동의하에 전원을 하였다 하더라도 수술을 기피한 사유 자체가 부당하다면 사건의 본질이 달라질 것은 없다. 에이즈라고 하는 질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차별적 태도가 이 사건의 근본원인이라고 생각한다.

1981년, '죽음의 병'으로 묘사되며 에이즈라는 질병이 등장하였다. 이 당시 에이즈는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써볼 수 있는 치료약이나 진단기법이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유행의 공포는 전 세계를 떨게 하였으며, 금욕과 콘돔사용이 유일한 방책으로서 강조되었다. 에이즈 환자들의 건강과 인권은 사회의 관심 밖이었다.

심지어 이 병의 확산을 억제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배제해도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반전되었다.

HIV는 생각처럼 쉽게 전파되지도 않으며, 그다지 치명적이지도 못한 것이 입증되었다. HIV에 감염된 환자의 면역기능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타인에 대한 전파력도 크게 억제할 수 있는 항바이러스제제의 개발은 에이즈라는 질병의 위세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에이즈는 고혈압, 당뇨병과 마찬가지로 유지 가능한 만성질환이 돼버린 것이다.

지난 1985년 우리나라에서 최초 발생되었던 HIV 감염 환자는 현재까지 잘 지내고 있다. 배우자에게 HIV를 전파하지 않고 건강한 아이까지 출산한 에이즈 환자 사례도 이미 국내에 많이 있다. 에이즈의 실체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들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국민들의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과거의 부정적 틀에 고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의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가 지난해 조사해본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 의과대학에서는 에이즈와 관련한 수업을 2시간 남짓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시간의 대부분을 바이러스 특성이나 임상경과 등을 설명하는데 할애하다보니, 정작 의사로서 꼭 알아야 할 의료행위 중의 전파가능성이나 예방수칙 등은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즈 환자를 접할 기회가 비교적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장항문외과, 비뇨기과 전문의들의 대략 3∼4% 정도만이 에이즈 환자를 진료한 경험이 있을 뿐이다. 교육의 기회와 진료 경험이 적다보니 의사들에게 있어서도 에이즈는 공포와 회피의 대상인 것이다.

갈수록 각박해지고는 있다지만 의사에 대한 환자들의 존경은 여전하다. 힘든 과정을 통과하여 의사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다수 의사들이 직무상의 위험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며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려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이유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사의 위험감수를 당연시해서는 안 되며, 가급적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의료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A 대학병원 의료진들은 HIV 감염 환자를 수술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의료행위이고, 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특수 수술장갑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의학적 근거 혹은 교과서적 예방원칙과는 거리가 있는 인식이다.

외국의 연구에 의하면 의료행위 중 에이즈 환자에게 쓰여 졌던 주사바늘, 수술용 칼 등에 의하여 의료인이 상처를 입을 경우 HIV에 감염될 확률은 평균 1/300~1/1000 수준이었다.

B형간염 바이러스보다 아주 낮은 확률이다. 의료행위 중 노출사고를 당하였어도 항바이러스제제를 투여하게 되면 감염위험의 80%정도를 추가적으로 낮출 수도 있다.

수술시 노출사고의 빈도, 최소 10년은 된다는 HIV의 긴 잠복기, 그리고 그저 그런 정도의 치명률까지를 고려한다면 HIV 감염 환자를 수술하는 것이 그리 위험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의료행위 중의 HIV 전파사례가 발생된 적은 없다.

이 정도의 위험으로 인하여 환자 수술을 기피해도 되는 것이라면, 독감 유행기간 중 개원가는 집단휴진을 하여야 하고 응급실 당직의사는 무장경호원의 호위 하에서만 진료를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료행위 중의 HIV 전파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편적 주의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또한 사고 노출 후에는 예방치료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체액을 통해 전파되는 거의 모든 질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칙들이다. 보편적 주의원칙이란 환자들의 실제 병원체 보유상태와 무관하게 온갖 병원체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을 하여 환자 체액과의 접촉을 가능한 회피하라는 것이다.

특정한 병원체를 갖고 있다고 확인된 환자라고 해서 특별한 취급을 하는 것은 보편적 주의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누가 더 위험한 병원체를 보유하고 있을 지 완벽하게 확인해 내는 것이 현재 의학기술로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특정한 환자를 특별하게 취급하려 할 경우 인권침해 소지에 비하여 예방상의 편익이 크지도 않을 뿐이다.

특수 수술 장갑이라는 것은 있으면 써봄직한 수단임은 분명하지만, 수술 등 의료행위를 기피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A 대학병원 관계자분들의 주장과 하소연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의료인은 사회적 낙인과 차별받는 환자들에게 삶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한다. 국민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개선하는데도 우리 의료인들이 하여야할 일들은 많다.

병만을 치료하는 소의(小醫)가 아니라 환자의 삶을 고민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도 앞장서는 중의(中醫)와 대의(大醫)의 역할도 하겠다고 한번쯤은 다짐을 해보았을 것이다.

의사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이번 사건을 통해 필자 또한 의사의 책무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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