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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담쟁이

청진기 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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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11.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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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빈(계명의대 교수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 임만빈(계명의대 교수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우리병원과 중학교 사이에는 높은 담장이 있다. 병원 쪽의 벽은 온통 담쟁이들로 덮여 있다. 그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딱딱한 시멘트벽에서 무엇을 얻어먹고 살아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여름에는 풍성한 잎들로 온 벽을 감싸서 삭막함을 가려준다.

요즈음은 늦가을이어서 잎은 짙은 주황색으로 변해있고 군데군데 떨어져나가 엉키고 설킨 줄기들이 이곳저곳에 드러나 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저렇게 서로 엉키고 설켜서 서로 부둥켜안고 오르고 있구나. 그렇게 해서 저렇게 높은 담도 오르는구나. 죽을힘을 다하여 파고들면 메마른 시멘트 바닥에서도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밤에 갑자기 병원에서 호출이 왔다. 열일곱 살 고등학교 2학년, 우측 전두엽에 뇌혈관기형이 파열된 뇌출혈 환자 때문이었다. 밤새 출혈의 원인이 된 혈관기형과 혈종을 제거하였다. 수술을 마치고 보호자한테 수술결과를 설명하는 동안 환자의 아버지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환자는 회복했지만 좌측 반신의 마비가 남았고 이따금씩 간질발작 증세를 보였다. 퇴원 후 한동안 왼쪽을 절뚝거리며 바른손으로 아버지의 왼손을 잡고 외래를 방문하여 항 경련제를 받아가곤 했다.

아버지는 바른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왼손으로 자식의 바른손을 잡고 이끌곤 했다. 그렇게 외래를 다니면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어느 날 그가 혼자 병원에 왔다. 몇 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버지의 근황이 궁금하여 물었다.
"아버지는 건강하게 잘 지내지죠?"

갑자기 그의 눈빛이 침울해지더니 눈가가 붉어졌다. 2년 전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가 취직한 것이 너무 기뻐 술 한 잔 먹고 비틀거리다가 교통사고를 입고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참말로 안 되셨어요. 제가 취직해서 잘 모시려고 했는데···. 제가 눈으로 보면서 길을 안내하면 왼쪽이 마비되어 절뚝거리는 저를 이렇게 제 바른 손을 잡고 끌어 주시던 아버지였는데요. 학교에 갈 때도, 병원에 올 때도 꼭 같이 오시곤 했었는데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것이 운명인데요."

눈가를 주먹으로 훔치더니 멋쩍은 듯 씽끗 웃고 진찰실을 나선다. 마비된 왼쪽 손보다 바른 손이 더 허전하고 안돼 보였다.

그도 어쩌면 담쟁이들이 기어오른 시멘트벽보다 더 단단한 절망의 삶의 벽을 경험했었을 것이다.

앞 못 보는 아버지를 가진 것도 서러운데 갑자기 반신 마비가 된 자기 모습을 보았을 때 절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느꼈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의 눈이 되고 반신이 되어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의 문을 열도록 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끝으로 이제는 잡아주지 않아도 그 혼자 뿌리를 박고 스스로의 가지를 만들어 세상이라는 막막한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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