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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기

느리게 걷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9.05.2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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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하나(이화의대 교수 이대목동병원 비뇨기과)

여름인지 봄인지 당최 구분이 되지 않는 5월의 주말, 나는 십 여 년 만에 대학로의 카페 테라스에 한가로이 앉아있다.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하자며, 굳이 마주앉지 않고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나란히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물끄러미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한 마디 던진다.

"저 길에 돌아다니는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똑같은 얼굴이 하나도 없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왜 전엔 이걸 몰랐을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그런데, 그 순간 번뜩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찬찬히 누군가를, 주변을 살펴본 적이 언제였을까. 하루에도 수 십명을 만나고 진찰하고 치료하는 의사이면서도.

대학병원에 있다 보면 모든 것이 속도전이다.

진료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보고자하는 환자는 많다보니 어쩔 수 없다(요즘같이 힘든 때에는 이것도 세상물정 모르는 배부른 투정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진료실이 지나치게 한가해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원장님들께서는 넓으신 아량으로 양해를…). 말도 빨리, 챠트 작성도 빨리 빨리, 처방 입력도 빛의 속도로.

아침에 회진 돌면서 지시한 처치 결과를 못 기다려 전공의를 닦달하고, 다음 수술 준비가 빨리 안 된다고 입이 험해진다. 물론 일의 특성상 분초를 다투는 경우도 많고 차분차분 느릿느릿 하다가는 환자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불치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속도전이 필요할 때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빨리 일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하겠지만, 외래 진료실에서 환자를 볼 때는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을 찬찬히 볼때처럼 여유가 필요하기도 한 것 같다. 서두를수록 놓치고 실수하고, 치료가 잘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정신없이 바쁘고 일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속이 필요하게 되면, 머릿속에 빨간불이 들어오면서 잠시 쉬도록하는 장치를 심어놓고 싶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느리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다니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있다.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어쩜 그렇게 내게 필요한 말인지. 환자를 진료할 때는 '잘' 봐야지, '빨리'봐야 하는 건 아니건만.

진료실 밖의 험난한 의료 환경은 갈수록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고무줄의 양 끝을 쥐고 팽팽하게 끊어질 듯 말 듯 반대 방향을 향해 숨차게 달려갈 수 밖에 없는 날선 긴장과 불신을 키우고 있지만, 모두가 한 번 쯤은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고 천천히 걸어봐야 할 때일 것 같다.

한 번은 뒤로도 가보고, 또 한번은 앞으로도 가보고, 때로는 옆에도 가보고. 미친 듯이 달려갈 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십 여년 만에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즐기고 있었던 그 곳은 정말 느려도 좋을 만 했다. 훤칠한 꽃미남들이 샤방샤방 미소를 날리며 서빙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 시간 동안 과도하게 야외에서 수분 섭취를 한 나는 눈가에 늘어난 기미와 주근깨라는 달갑지 않은 선물을 달고 집에 가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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