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 하나로 지켜온 30년세월 "후회없지만 할 일 아직도 많아"
사명감 하나로 지켜온 30년세월 "후회없지만 할 일 아직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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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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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권경철 원장

· 1928년 함북 경성출생
· 1947년 서울의대 졸업

  권 원장이 막상 제대를 하려니까 군당국과 관계기관은 물론 지역주민들마저 떠나지 말고 개업할 것을 호소해 왔다. 그런 호소를 외면할 수 없어 권 원장은 전역과 함께 1년만 머물겠다는 생각으로 하꼬방 같은 방 한칸에 진료실을 차리고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 강원도 화천읍 권의원 권경철 원장

  화천(華川)은 38선 이북에 위치한 곳으로서 6·25 당시 탈환된 이른바 수복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주민의 40% 정도가 이곳 토박이일뿐 나머지는 대부분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화천은 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전쟁의 페허 위에 판자집들만 들어선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주민들 자체가 통일의 그날 제일 먼저 달려 가겠다는 일념으로 찾아들었을뿐 영구적인 안주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부터 비롯된 정책적인 배려에 힘입어 이제는 제법 시가지다운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외양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문제가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다. 첩첩산중에 둘러쌓여 있다보니 뚜렷한 농산물도 없는데다 군인도시로서의 번창도 이제는 과거의 영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혜의 풍광을 이용한 관광지로서의 탈바굼을 꾀하고 있지만 그것 또한 결과는 미지수이고 보면 해마다 상주인구가 줄고 있는 실정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이처럼 사람을 끌만한 매력도 없고, 의사라면 누구나 꺼리는 화천에 30여년째 인술을 펼치고 있는 ‘권의원’의 권경철(權景澈) 원장이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데에는 아주 재미난 일화가 있다.

  권 원장은 58년 9월 전역을 할때까지 군병원인 이곳 제 2이동외과병원에서 외과의로 근무를 했다. 당시만 해도 5개의 민간병원이 있었으나 외과병원이 없어 지역주민들의 수술은 권 원장의 전담사항이었다. 그런 권 원장이 막상 제대를 하려니까 군당국과 관계기관은 물론 지역주민들마저 떠나지 말고 개원할 것을 호소해 왔다.

  그런 호소를 외면할 수 없어 권 원장은 전역과 함께 1년만 머물겠다는 생각으로 판잣집 같은 방 한칸에 진료실을 차리고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화천과의 인연은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어 어느새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29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던 권 원장의 머리도 이제는 반백이 다 된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권 원장은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2남3녀의 자식들은 모두 서울 처가에서 성장을 했으니 말하자면 부모로서의 역할을 감당치 못한 것이다. 때론 자녀들의 눈물어린 호소와 친구들의 권유로 인해 권 원장도 한때는 마음이 흔들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인술을 불태워야겠다’는 신념이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시켜 주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10여년 전만해도 화천은 교통이 몹시 불편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권 원장은 초창기 때는 자전거로 그후에는 오토바이 한 대를 구입해 산간벽지를 돌며 위급환자들의 생명을 구해야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년 전인데 밤중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부인이 애를 낳다 하혈을 하며 다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40여리나 떨어진 곳인데다 길도 나빠 남자를 태우고 갈 수는 없었다. 권 원장은 약도 하나만을 그려 들고 오토바이를 내달렸다.

  찾아가 보니 산모는 이미 하혈이 심해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병원으로 데려와야 할 형편인데 도리가 없었다. 권 원장은 지나가는 사람을 하나 불러 산모를 뒤에 태우도록 했다. 그리고는 끈을 구해 산모를 자신의 몸에 칭칭 감도록 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좁고 가파른 길을 인사불성의 산모를 태우고 오자니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오토바이는 기우뚱 거리고 산모의 하혈은 엉덩이를 적시다 못해 속내의까지 젖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산모를 살리느냐가 더욱 다급한 문제였다. 병원엘 도착해 보니 산모는 물론 권 원장까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의 보람도 없이 산모는 몇시간후 끝내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가슴아파하는 이 일은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일로서 권 원장은 수 많은 수술을 했지만 한번도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 변변한 시설도 없이 이루어진 그 많은 수술들은 지금와서 보면 무모하기조차 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격전지여서 폭발물 사고가 많고, 따라서 응급을 요하는 수술환자가 많았는데 비포장 도로를 털털 거리며 춘천으로 가다가 죽게 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편이야 어떻든 책임이나 회피하려는 의사였다면 그런 모험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불우한 이웃에 대한 남다른 동정심과 인술에 대한 철저한 사명감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일들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1928년생으로 함경북도 경성(鏡城)이 고향인 권 원장은 돌을 넘기자 교편을 잡고 있던 부친을 따라 만주 하얼빈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성장을 했다.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의대 1년에 재학중이던 권 원장은 해방이 되자 단신 월남,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에 편입을 했다. 그리고 졸업을 한 것이 49년의 일로써 서울의대 3회가 된다.

  권원장은 서울의대 재학시와 졸업후 서울대학병원 외과에서 근무할 때부터 경기도 광주군 신사리, 그러니까 지금의 영동지역의 신사동에서 무의촌진료사업을 펼쳤던 적이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무의촌의 참상을 목격한 권 원장은 주민들의 등불이 되어보겠다는 일념 밑하나로에 정착을 결심하고 이곳에 신혼살림을 차렸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6·25로 인해 좌절되고 권 원장은 피난을 간 전라남도 영광에서는 청진기 대신 총을 들고 인민군에 대항해 유격전을 벌였던 일도 있었다.

  이런 전력의 권 원장인 만큼 무의촌 무료진료사업이야말로 평생의 꿈으로 키워올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지금의 현실에 만족 보다는 불만을, 보람보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평생의 꿈을 100% 실천치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가슴을 쳐오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한 안타까움은 어디까지나 권 원장의 꿈과 이상이 높고도 원대한데 연유하는 것이지, 그가 살아온 반생이 결코 헛된 것인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주민 1만여명 중 70?80%가 의료보험환자이고 의료보호환자까지 합치면 90%이상을 점유하는 지역적 여건에다 그나마 돈 없는 영세민 환자들도 많아 권 원장은 무료진료사업을 많이 해주고 있다. 또한 장로 직분을 맡고 있는 중앙교회 부속유치원 원장을 맡아 육영사업에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특히 10여년 전에서야 세를 면하고 하1리 43의 26에다 조그만 병원건물을 신축, ‘권의원’을 운영해 오고 있는데 병원이 2곳 밖에 안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니 하루 수면시간이 3시간을 넘기기가 힘든 형편이다. 이런 과로를 하다보니 건강을 해쳐 쓰러진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 초대 대의원을 6년간 맡았던 권 원장은 지난 73년 로타리클럽을 창설, 7년간 회장으로 일해왔고 30여개의 지역사회 감투를 갖고 있으면서 사회봉사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만학의 꿈을 불태워 73년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법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남다른 사명감이 없다면 아예 의사라는 직업을 택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권 원장. 권 원장은 오늘의 의과대학이 번창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인기가 있다는 그 자체가 영리적인 목적에서이지 정말이지 인술의 참뜻을 펼쳐보겠다는 사명감에서 이루어진 결과이겠느냐는 반문이다.

  만남이야 어떻든 이제는 완전한 화천인이 되어버린 권 원장. 부와 명예의 길도 마다하고 한 시골 의사로서 몸받쳐온 권 원장은 앞으로의 여생도 이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다. 몇 년 전에서야 병원건물에 붙여 살림집을 마련한 권 원장에게 남은 소망이 있다면 정말이지 순수한 의미의 무의촌 무료진료. 신변정리 삼아 지금의 병원을 몇 년 더 운영하고 나면 앰뷸런스 한 대를 구입, 벽지를 돌며 무료진료에 힘쓸 계획이란다.

  이런 권 원장의 소망은 허황된 꿈일까? 아닐 것이다. 저 20대 젊은 청년시절 권원장은 한국의 슈바이처, 심 훈의 상록수를 꿈꾸며 농촌으로 뛰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권 원장이 가진 것이라고는 맨주먹 뿐이었을 뿐 사흘째 되는 날부터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권 원장은 아니다. 그가 살아온 경륜과 삶의 깊이가 젊은날의 의욕과 더불어 더욱 보람 있는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어느 자리에서건 노래 대신 하모니까를 즐겨 연주해 ‘하모니카 할아버지’로도 통하는 권 원장. 그러나 권 원장의 소망이 어디에 있든 그것은 차후의 문제일뿐 과거에 대한 보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온 지난날은 결코 의미없는 반생은 아니었으며 그것 자체만으로도 지역사회의 등불로서 손색없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고마우신 의사선생님’ 화천인들의 가슴속에 권원장의 인술의 자애로운 손길은 영원히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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