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대가는 꽤 크다"
"배움의 대가는 꽤 크다"
  • 여한솔 전공의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R2)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9.2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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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솔 전공의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R2)

누구의 탓인지도 이제는 지적하고 싶지도 않은 사분오열된 오늘 의료계의 현실을 적어보자니 마음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서 예전 인턴 때 기억을 떠올려 글을 작성해본다.

본원을 잠시 떠나 다른 응급실을 지키고 있던  인턴시절 이야기다. 밤 9시쯤 119차량에 의해 과호흡 환자가 왔다. 평상시 우울증, 공황장애로 정신과 진료를 받던 분이었다. 병력 청취를 하니 금일 오전에도 남편과 말다툼을 하여 과호흡 증세가 있었고, 내원 직전에도 전화 통화상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큰소리로 다투고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해 과호흡으로 119를 불러 내원했다.

문제의 발단은 이 환자의 남편이었다. 다짜고짜 MRI를 찍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아까 과호흡 발현 당시 얼굴 쪽 경련이 있었고 환자가 2∼3분간 숨을 못 쉬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뇌 병변이 있을 것 같으니까 MRI를 찍어봐야겠다고 한다.

사실 내가 이 병원에서 계속 몸을 담고 있어야 할 의사라면 피곤하게 환자 보호자 설득할 필요도 없이 MRI 오더를 냈을 것 같다. (물론 비급여로) 하지만 이 의료원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응급실 역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환자가 응급실에 내원해 비타민 수액을 맞고 싶다고 말한다고, 환자의 편의를 무조건 봐준다면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진짜 안정해야 할 환자의 침대가 없을 수 있고, 반드시 응급치료를 받아야 할 중증도의 환자가 적절한 초기치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보호자가 말한 의학적 효용성이 떨어지는 MRI 검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곳은 건강검진센터가 아니라 응급실이다. 의사의 판단하에 꼭 이 검사를 시행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면 아무리 환자 보호자가 요구하더라도 이 검사를 시행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응급실의 '체계'가 무너진다. 나 하나 편하게 하자고 그 체계를 무너뜨릴 순 없었다.

환자의 남편에게 정중하게 차분히 설명했다. 이 안면근육 경련은 일시적인 심리적 원인 하일 가능성이 높고 (내원 전날에도 똑같은 증상으로 이 환자는 응급실에 내원했었다. 전날 검사기록을 까 봤었어도 정신과적 문제 이외에 과호흡을 유발할만한 기저질환의 가능성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 뇌출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 CT를 찍어보자. 지극히 정상이었다. MRI를 이러한 상황에서는 찍을 수 없다는 이유도 말씀드렸다. 하지만 이 보호자는 말 그대로 막무가내였다. 옆에서 차분하게 거들어 도와주신 간호사 선생님에게도 "네가 의사야? 의사 아니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속으로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저 의사인데 제 말 안 들으셨잖아요.^^"

앞선 보호자를 도저히 달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 상황을 지켜보던 동기 인턴이 밖으로 달래러 나가고 나는 다시 히스토리를 시작했다.

보호자들의 캐릭터들을 봤을 때 이 환자가 정신적인 질병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이 질문은 정신과적 진료로 꼭 필요하기에 여쭙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고요, 평소 가족들과 이러한 말다툼이 잦았었나요?"라고 묻는 순간, 갑작스럽게 환자가 내 멱살을 잡으며 "이 개새끼야 네가 뭔데 나를 정신병원에 쳐 넣으려고 해?"라고 응급실이 떠나가라 격렬하게 소리쳤다. 정확히 그 말과 함께 내 당직복이 찢겼고 그와 동시에 얼굴을 가격했다.

'아 이때 안경이 박살 났었어야 했는데! 그래야 깽값을!'

난동을 피우니 또 그 문제의 보호자 남편이 들어와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나는 피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아니요, 저는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보호자분은 못 보셨지만 (찢어진 당직복을 보이며) 환자분이 이렇게 제 멱살을 잡고 찢었고 (삐뚤어진 안경을 보이며) 얼굴을 가격하셨습니다."

아마 사건의 처음과 끝을 보고 있었던 환자의 딸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다

내가 그런 발언을 환자 앞에서 직접 했다면 나는 패륜아다. 다행히 환자 딸은 답답한 표정으로 '이 말이 사실이냐?'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 '아빠 이제 제발 그만해' 환자들도 많았고 언성이 높아진 터라 모두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당당했지만 부끄러운 몫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리라….

함께 있던 인턴 동기는 '형은 어떻게 그 상황에서 참을 수가 있었냐? 나는 그 상황이었으면 뒤 안돌아보고 쥐어팼다.'라고 한다.

사실 나도 보호자가 나에게 폭행을 가했다면 과연 참을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해보지만 (그래도 참았을 것이다) 이 환자는 마음의 질병이 있다고 판단하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세상 어떤 일이든 화를 내면 지는 것이다…. 신고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병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나는 더 큰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먼저 들어왔던 DOA 환자 때문에 내과 선생님이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계셨는데, 선생님이 한 마디 해주셨다. "인턴 선생 고생이 많네, 방금 이런 일도 그렇고, 의사가 절대 좋은 직업이 아니야…. 너무 맘 상해하지 말고 빨리 잊어버려, 잘 대처했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식적이지 못하다. '못 배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처럼 속으로 비난하고 탓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래봤자 나만 손해이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일을 언젠가 자주 겪으리라 생각했는데, 조금 이른 시간에 겪은 것으로 생각하니 정신력 강화에 오늘 하루는 충분할 만큼 경험치를 쌓았다. 레벨업 된 기분이랄까.

그런데, 슬프다. 

내가 이유 없이 옷을 찢기고 얼굴을 가격당해서 슬픈 것이 아니다. 세상에 몸도 아프지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슬프다.

어떤 일이든 성장하기 위해선 성장통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빨리 성장하면 좀 덜 아프려나 싶기도 하다. 낡은 당직 복이어서 잘 찢어졌다고 생각하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배움의 대가는 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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