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존재들의 아름다운 교차를 꿈꾸며"
"불완전한 존재들의 아름다운 교차를 꿈꾸며"
  • 윤세호 기자 seho3@doctorsnews.co.kr
  • 승인 2018.09.1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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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대상작 <교차(交叉)>
이재원(가톨릭의대 의학전문대학원 4학년)
지난 15일 '제8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재원 작가. 사진 왼쪽부터 김인호 한국의사수필가협회장, 이재원 작가, 박정율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지난 15일 '제8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재원 작가. 사진 왼쪽부터 김인호 한국의사수필가협회장, 이재원 작가, 박정율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매해 학교에서 게시판의 의학도 수필공모전 포스터 앞을 한참 서성인 기억이 있다. 출품을 막연히 동경해오다가 마지막 학년이 돼서야 마음먹고 글을 보냈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럴싸한 소재와 주재를 찾아 궁리했지만 아마도 정말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나 보다"며 "한참을 돌고 돌아 결국 아빠와의 이별(죽음)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아빠와의 갑작스러운 투병생활, 온 가족이 마주해야 했던 그 무거운 현실…. 매순간 결코 만만치 않았지만, 그 가운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음을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동시에 지난 두 해의 임상실습 동안 스쳐 지난 많은 인연이 본인에게 의미있는 흔적을 남겼음을 글을 통해 고백한다. 

다음은 이번 대상수상작 전문이다.

 

 

대상수상작 <교차(交叉)>

 

쨍한 햇살이 나뭇잎에 닿아 통하고 튕겨 나오던 어느 초여름 날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기대해 온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의 공연에 갔다.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공연 동안 일흔의 거장은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반주자가 마련한 너른 정원에서 긴 세월 자신의 소리에 담아내었을 희로애락을 한없이 자유롭게 그려 내었다. 평생을 하나에 몰두하여 자신을 쏟아 온 사람, 때문에 때로는 괴로움도 슬픔도 또 환희도 혼자 소화해내어야 했을 예술가는 이제 참으로 자연스럽고 홀가분해 보였다. 연주회가 끝나고선 뜻밖의 사인회가 있었다. 나는 구부려 늘어선 긴 줄에 머뭇거리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라는 생각이 들어 맨 끝자락에 섰다. 서서히 짧아지던 줄 끝에 정경화 선생의 모습이 보이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를 포함해 마지막 다섯 명쯤 남았을까? 드디어 그의 앞에 섰다. 설레는 마음을 애써 고르고서 나는 "선생님, 정말 아름다운 구도자세요. 선생님의 바흐가 참 좋습니다."라고 했다. 연주자는 "바흐가 참 아름답죠?"라고 답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내 요청에 그는 선뜻 나와 볼을 맞대었고 우리는 여느 친구처럼 휴대폰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었다. 뜻밖의 대화 그리고 볼에 전해지는 거장의 따뜻한 온기에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말할 수 없이 좋은 동시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열성적인 팬이 좋아하던 스타를 만나 황홀한 기분이 아니었다. 순간 나는 이 자리에서 교차한 그의 존재와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본과 1, 2학년 시절, 끝없는 시험공부로 지칠 때면 나는 70년대부터 그가 세계 각지에서 연주하던 흑백 영상을 수없이 돌려보곤 했었다. 그러다 오늘 이날, 그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같은 시공간, 현재에서 마침내 물리적으로 교차한 것이다. 영상과 레코드판으로 아득히 전해지던 그의 열정, 음악에 담긴 다채로운 감정, 무엇보다 그가 음악으로 구도(求道)해 온 평생은 살아있는 존재와의 만남을 통하여 강렬하고 생생한 실체가 되었다. 몹시 감동적이었다. 

이처럼 나의 생은 다른 많은 이의 생과 교차하여 아주 고유한 무늬를 새겨왔다. 때로는 짧고 강렬한 만남이었고 때로는 은은히 스며드는 기억이었다. 그 모든 교차의 기억들은 내게 고스란히 남아 나의 현재를 빚어낸다. 지난 두 해, 나는 병원에서 수많은 환자와 가족들을 마주쳤다. 그들의 삶은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각각이 끝이 없는 서사이리라. 나와 그들은 찰나를 함께 했지만 그 교차의 순간은 때로 나에게 충격이 되었고 위로와 감동이 되었고 배움이 되었다. 

나는 정신과 실습 때 만난 한 어린 학생을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그는 난소암 재발 후 치료 중이었다. 우리는 매일 10여분 남짓 며칠을 대화했다. 그는 물론 병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 의학에 생긴 관심, 친구들이 항암 치료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서운함, 동생과 엄마에 대한 미안함 같은 아주 진솔하고 고유한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그에 대한 기억은 내 안에 오래 남아서 침상에 누운 각 사람에게 특별한 자기다움이 있음을 상기하게 한다. 선배 의사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회진 시간 노교수님과 함께한 잠깐은 때로 그의 수십여 년 수련 과정을 응축하여 경험하게 했다. 어딘 가에서는 죽음이 계속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만 그 모두가 이어져오는 건 이 우주 속에서 우리 존재가 겹겹이 교차하고 그 교차된 기억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본과 2학년 여름, 내가 한창 호흡기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췌장암 수술을 받은 뒤 회복 중이던 아빠에게 그해 봄부터 알 수 없는 열이 지속되었다. 간농양이라 했다. 입원이 길어지고 독한 항생제를 쏟아부었지만 점점 농양과 암의 전이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해졌다. 아빠는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집 근처 대학병원에 엄마와 함께 있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나는 다음 해 겨울방학,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이주 전쯤 그와 함께 아빠에게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놀랍게도 나는 그날 정말 큰 사랑을 받았다. 잠깐은 어리광을 부렸고, 소년 같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내 양 볼을 쓰다듬어주던 아빠 품에 꼭 안겼다. 아빠는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빠가 도와줄 문제가 없는 지 물었다. 남편 될 사람에게는 따뜻한 응원과 나에 대한 당부를 했다. 이름 모를 아프리카 섬나라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했을 땐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며 깔깔 웃었다. 아빠와 나 모두 우리가 함께할 겨울이 쉬이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있었던 그 순간의 진실이 그날의 교차, 아빠와의 만남이 내게 남긴 흔적이다. 그날, 너무 쇠약해져 병실을 나서기 힘들던 아빠는 고집을 피워 나와 나의 남편 될 사람 그리고 엄마에게 병원 지하식당 저녁을 사주셨다. 입원 이래 첫 외식이었다. 아빠는 본래 멋있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떠났지만 나는 그날 병실과 복도에서 내 볼을 만져주던 아빠와 그 공간의 공기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기억이 내 마음 깊이 남아 물리적인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때를 떠올리며 사랑받는다. 어쩌면 아주 먼 훗날, 깊이 슬프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마지막을 겪고 있는 어느 환자와 그 가족에게 아빠에게 받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주에서 별과 별이 충돌하여 빛을 뿌리듯 우리 존재도 서로의 시공을 맞닥뜨려 흔적을 남기고 그 중 어떤 기억은 아주 오래 남아 멀리 이어진다. 환자와 초보 의사, 노교수와 학생, 이 세상을 떠나가는 이와 남은 이들은 이렇게 이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서로의 오선지에 음 자락을 더한다. 각각의 교차는 물리적으로 국한된, 특정한 시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깊이 소화되어 아로새겨진 우리의 화음(和音)은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연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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