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호 (대한의사협회 고문, 한국의사수필가협회 회장)
내가  친구 P 의 아픔을 이제 와서 깨달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한 마디를 모른 척 했다면 나는 에고이스트임에 틀림없다.

그가 떠난 지 17년이란 세월이 지난 요즘, 뜬금없이 그의 절박한 표정이 꿈 속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9월의 바람이 그 해처럼 때묻은 여름 날의 무력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는 마산의 준종합병원 신경외과 의사였고 나는 서울 변두리 소아과 개원의 였다. 우린 가난 속에 의과대학을 다니며 둘 다 변두리 출신으로 의대 별무리 동아리 멤버 였다.

한국 현대사에 남을 의료대란이 일어났던 2000년 이른 봄,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나는 단식투쟁 중이었다. 정부의 준비 없는 의약분업 강제시행에 따른 의사들의 반대투쟁에서 당시 나는 의사협회의 주 담당 의무이사로 최일선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협회장과 함께 강경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한 투쟁이 가열되며 전국단위 개원의사와 전공의, 대학교수까지 나서는 휴진투쟁이 진행되고,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야당 당수가 회동하며 의료계 요구를 논의하고 국민의 불편함과 정부의 강행과 의료인들 간에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을 때였다. 단식을 끝낸 나는 의약분업대책위원장을 맡으며 의사들 내부 통신망을 통해 상황을 보고하고 각 직역 회원들의 불만을 정리하고 언론의 심야토론 방송에 의료계 토론자로 참석하여 국민을 설득하려 했다.

그 때 정부가 7월부터 의약분업을 '선 시행 후 개선' 이란 공개제안을 했고 의료계는 믿을 수 없다며 준비될 때까지 의약분업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파업을 이끄는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를 창설하여 비상대책 역할을 하도록 했다. 강력한 전국의 의쟁투 위원들의 밤낮없는 회의로 결사 항쟁의 뜻을 표명하며 응급환자를 제외한 모든 진료를 거부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위기에 몰리면 조직의 투쟁은 양분되기 마련이다. 파업이 3주이상 장기화되고 7월이 다가오자 의료계 내부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되기 시작했고 협회장과 실무진은 '선 시행 후 개선'으로 기울며 정부안(案)을 일단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으로 가닥을 잡으려는 때였다.

나는 의쟁투 의결사항을 갖고 정부와 약사 팀과 마주 앉았는데 만약 시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의사들의 진료권이 침해 받지 않는 약사법 개정안 작업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초안을 의쟁투 전체 회의에 보고하자 강경한 지방 의사단체는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6월 말 회원들 전체의 의사로 결정하자는 수뇌부의 결론으로 전국 단위 별 '파업 지속여부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 했다. 그 때였다. 경남 마산 지역의 의쟁투에 적극 가담하고 있던 P 가 통신망에 나를 겨냥하며 글을 올렸다.

"친구여! 아웃사이더가 되진 말게. 양떼 무리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같이 동행하고 있네. 비록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모두가 찾아가는 의로운 길이라면 뒷걸음치거나 멈추어 서지 말게나. 부디 광야에 홀로 떨어져 아웃사이더의 고독에 빠지지 말아 주게. 그 곳이 아무리 천국이라도 자네가 걸어 온 길이 아니지 않은가."

불과 몇 개월 전, 마산 앞 바다의 야경을 바라보는 카페에 앉아 그가 좋아하는 모차르트 심포니 40번 G 마이너를 들으며 의사의 길, 한국 땅에서 의사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밤 늦도록 논쟁을 했었다. 신경외과 의사인 P 는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두개골을 열고 뇌경막 속 병변을 찾으면서 의료보험 제도 속 진료지침을 계산하는 의사이기를 바라는 한국의 의료 행정에 울분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낙동강을 낀 시골에서 조실부모하고 찢어진 가난의 굴레에서 의사가 된 P는 의료윤리에 대해서는 편협할 정도로 강직했다. 깐깐한 성격에 감정 기복이 심하여 전공의 시절에도 밤새 지킨 뇌수술 어린아이 환아의 죽음 앞에 하루 내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감정이 여리었다. 그 때 나는 서울의 중앙 의사단체에서 대정부 정책 방향에 깊이 관여돼 이미 의료계의 한계를 터득하였기에 어떻게 하던 의사의 진료에 제도의 올가미가 걸리지 않도록 물꼬를 트는 협상의 선봉에 서 있었다.

"여보게 P! 정부는 의사 길들이기 작전에 이미 성공했네. 1977년 정부의 강제 의료정책, 선배 의사들의 미온적 대응, 의료보험 미래의 무지와 무관심이 오늘의 통제 의료로 묶이게 되었네. 의료는 사회주의 아닌가. 어려운 문제 일세…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니 그 굴레에서 내 진료 스타일을 찾을 수 밖에 없네. 너무 진료 윤리에 매이질 말고 적정한 접점을 찾아 보자구…"  의료의 본질과 우리가 처한 현실의 부조리에 50대 초반의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억울해 했었다. 그러나 그 때 P 는 결연히 단호하게 선언했다. "언젠가 오리라. 우리들 의사 모두의 의료행위가 교과서에서 익힌 대로 맘 놓고 진료할 수 있는 때가… 그 때를 위해, 그 때가 오면 우린 한 배를 타는 거야…!" 우린 맥주 잔을 부딪쳤고 눈 빛으로 다짐했다.

"마산 밤바다에서 자네는 얼마나 억울해 하였는가. 우리가 기다리던 그 날이 왔는데 그 높은 곳에서 뭘 하는가. 뭘 망설이는가.친구여! 난 자네가 있어 아프네!"

당시 의사들 홈페이지 광장에는 그의 글이 도배를 했고 전국의 네티즌들은 그의 글에 환호를 했다. 특히 마산 경남 지역은 거의 폭풍 전야 같았다. 나는 침묵했다. 그의 글을 보며 가슴이 쓰려 왔다.  의쟁투가 실시한 전국 단위 투표 결과는 1% 정도 미세한 차이의 휴진 철회 쪽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를 승복할 수 없다며 협회를 에워싼 강경회원에 당시 복지부장관도 문전 박대로 돌아갔다. 단체 휴진 유도 책임으로 의협회장은 구속되고 나는 사표를 내고 북한강변 집에 칩거하기 시작했다.

그 해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 눈보라가 강바람과 함께 정원을 휩쓸고 있을 때, 나는 P 가 마산 뒷동산 기슭 소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의 열정과 강직함을 사랑하는 당시 마산 경남의 동료 의쟁투 위원들은 그의 글을 모아 유고집을 발간했다. 그 책이 내 손에 전해 졌을 때, 나는 참았던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난생 처음 목 놓아 울었다. 책 겉 표지에는 검은 바탕에 붉은 색깔의 필기체로 휘날리듯 적혀 있었다.

"자네가 있어 나는 아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