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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터 박사의 백일몽
솔터 박사의 백일몽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6.03.2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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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황건 교수
처음 가본 여행지에 조형물이 설치돼 있으면 눈여겨 보게 된다. 더욱이 인물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면 그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대개 받침대 밑에 써있는 이름과 생몰연도 또는 약력을 읽게 된다.

런던의 동쪽 끝부터 템스강 올레길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멀리 타워 브릿지와 유럽에서 가장 높다는 사드(Shaad)가 보이기 시작하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버몬지(Bermonsey) 지역이다. 강변의 '디 엔젤(The Engel)'이라는 술집을 지나자마자 강둑을 마주한 조그마한 광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매우 특이한 동상들을 보았다.

돌 벤치에 중절모를 쓰고 안경을 걸친 노인이 두 손으로는 우산 손잡이를 짚고 앉아 있었다.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강둑의 벽돌담인데 어른의 가슴높이 정도됐다. 예쁜 드레스를 입은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한 손으로는 드레스의 끈을 만지며 벽돌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노인의 몇 미터 왼쪽에는 중년여인이 오른 손에 삽을 짚은 채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팔과 옆구리 사이의 틈새에 누군가가 생화를 꽂아 놓은 것이 보였다. 벽돌담 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있었다. 이 네 동상이 하나의 작품이었다.

광장 모퉁이에 설치된 안내판을 보았다. 제목이 '솔터박사의 백일몽(Dr. Salter's daydream)'이었다. 읽다 보니 마침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교의 이름이 나오기에 집중하게 됐다.

동상의 주인공 솔터박사(Alfred Salter)는 1873년 태어나서, 1896년 가이스의과대학(Guy's Hospital Medical School, 현재 King's College Medical School)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2년 후 양심에 따라 당시 빈민촌이었던 버몬지 지역에 정착해 인술을 펼쳤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무료로 진료했으며, 이를 제도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빈민촌은 사회적인 개혁이 없이는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믿고 노동당에 입당해 하원의원이 됐다. 진료소를 세우고 결핵요양원을 만들고 위생교육을 돕는 영상물을 제작해 길 모퉁이에 정차한 트럭에서 상영했다. 이러한 일들이 현재 영국의 국민의료보험(National health service, NHS)의 시초가 됐다.

1900년에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사업가 아다 브라운 (Ada Brown)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주민투표로 노동당 출신으로는 영국 전체에서 첫 구청장, 여성으로서는 런던 첫 구청장으로 선출됐다. 구청장 재직 동안 9000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빈민가를 녹지로 바꾸어 놓았다. 지역주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또한 일체의 특권을 피하기 위해 솔터 가족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그 지역의 중심부에서 살며 외동딸을 거기서 교육시켰다. 그런데 결혼한지 10년 되던 1910년 8세 된 외동딸 Joyce를 성홍열로 잃었다. 딸의 사망은 지역주민과 솔터 부부를 더 가깝게 만들었을 것이나, 부모의 비통함은 말할 수 없었으리라.

안내판을 다 읽고 나서야 작품의 제목이 이해가 됐다.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모두 먼저 보낸 노년의 의사가 강변의 벤치에 앉아 행복했던 시절의 백일몽(daydream)을 꾸는 것이다.

솔터 박사는 어떤 백일몽을 꾸고 있을까. '솔터박사의 백일몽' 동상.
우리나라로 치면 병자수호조약보다 3년 전에 태어나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시행되던 해 졸업해 해방되던 해(1945)에 작고한 한 영국의사의 사연을 읽고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특권을 피하기 위해(to avoid privilege) 빈민가에서 살다간 의사이며 정치인이었던 그를 추모하기 위해 동상을 건립한 것이다.

솔터박사보다 13년 늦게 태어난 크로닌(A. J. Cronin, 1896-1981)이 쓴 자전적 소설 <성채(The Citadel)>가 생각났다. 주인공 '앤드루 맨슨'은 남 웨일즈의 탄광촌에서는 장티푸스가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않는 행정부에 대항해 다이너마이트로 하수구를 폭발시키기도 하며, 낙후된 지역에서 비과학적이고 경험에 의존한 상투적인 치료를 하는 기존의 진료에 대해 회의를 갖고 열심히 탐구하며 치료한다. 그러다 런던에 자리잡고는 상류층 환자를 치료하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간주사 따위를 놔주며 건강염려증에 빠진 노파들에게서 고액의 진료비를 받는 등 초심을 잃어가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다시 솔터박사 앞에 섰다.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시선은 강둑의 담장이나 딸에게 고정돼 있지 않고 템스강의 건너편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이뤄야 할 이상향, 피안의 언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젊은 날의 이상을 부와 특권과 바꾸지 않은 선배의사에게 머리를 숙였다. 솔터길(Salter Road)를 따라 알프레드솔터 초등학교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어렵게 공부하고 있는 나의 아들도 솔터박사처럼 이상을 잃지 않는 후학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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