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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라깡도 식후경

청진기 라깡도 식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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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2.0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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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 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주이상스(jouissance)'에 심취한 적이 있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 라깡이 처음 도입한 개념으로 보통 향유·향락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기에는 왠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라깡이 말한 주이상스는 강력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언어영역인 상징계를 넘어서는 전복의 충동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쾌락원리를 넘어선 것이며 따라서 현실원칙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마치 세이렌의 목소리에 홀린 어부나 성교 후 잡아먹힌 사마귀처럼 죽음을 동반하기도 한다.

주이상스를 고통스러운 쾌락으로 설명한 강의를 들었다. 얼마 전 한국의사시인회에서 마련한 특강이었다.

'은유의 창조적 번득임'이라는 제목의 강의인데, 이를테면 라깡으로 시 읽기 정도가 아닐까.
라깡 분석치료 연구소장이기도 한 김종주 신경정신과 원장님이 흥미롭고도 난해한 라깡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 준 것이다.

라깡에 대한 출발점은 역시 프로이트다.
정신과 의사가 아닐지라도 무의식의 세계·꿈의 해석·리비도 등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내용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칼 융이나 자크 라깡에 대해서는 어떨까. 한 때 프로이트 추종자였다가 나중에 견해를 달리했던 융과는 달리 라깡은 프로이트의 계승자임을 자청한다. 그는 프로이트로의 귀환을 외치며 소쉬르의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에 도입해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라깡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이나 심리학보다 문학 쪽에서 더 빨리 또 더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시 라깡의 이론은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진지하게 경청했다. 욕망이란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라 욕망의 대상인 줄 알고 붙잡았다 싶으면 그것은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용이 깊어질수록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시니피에를 찾아가는 시니피앙의 몸부림처럼 열중했지만 뇌 용량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텅 빈 뱃속은 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은 식욕과 성욕이란 말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때 누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라깡도 식후경"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박장대소하며 환호했다. 결국 식사를 함께하며 강의를 계속 듣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아리송해하는 회원들에게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라깡은 원래부터 가독성이 없습니다. 쉽게 번역된 글은 그래서 잘못 번역한 글일 뿐이지요."

결국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짧은 시간에 이해하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말로 해석하고 나름의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신분석학의 흐름은 프로이트·라깡에 이어 지젝에 와 있는듯 하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라깡을 문화비평적으로 재해석해 명성을 얻은 사람이 바로 슬라보예 지젝이다. 이미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돼버린 지젝과 그 사상적 원류인 라깡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지만 그들 중에 그 이론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말 중에 라깡거리고 지젝거린다는 말이 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더 난해하게 말하며 자기 위선에 절어있는 사람들을 꼬집어 하는 말일 것이다.

한 시간 남짓의 강의로 라깡을 이해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우리는 근처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대화의 주제는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라깡을 실은 배는 바다에서 빠져나와 높은 산으로, 급기야는 하늘까지 오를 추세였다.

"정신과 전문의 시험에서도 라깡에 대한 언급은 없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라깡을 출제하고 채점할 수 있는 기준이 없거든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가 한 마디 거들었다.
정신분석의 최첨단인 신경정신과 전문의도 공부하지 않는 라깡을 우리가….

우리는 결기어린 표정을 잠시 접어 두고 빈 잔에 맥주를 가득 채웠다. 하늘을 날던 배가 비로소 바다로 돌아오듯 대화의 주제는 요즘 한국시단의 흐름과 새해 소망으로 바뀌었다. 잠시 출렁거리던 한국의사시인회가 다시 신변잡기를 적재하고 순항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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