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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민진식교수

[인터뷰]민진식교수

  • 김영숙 기자 kimys@kma.org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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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암 표준진료화와 최신 요법의 개발로 국내 암연구 격상

“허전하고 섭섭합니다. 세월이 원망스럽습니다.”

평소에 지켜본 추사 민진식 교수(외과학)는 좋고 싫은 감정의 변화를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정년을 맞은 그에게서는 못내 아쉬움의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62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군재직 3년과 해외연수시절을 제외하곤 만40년을 연세의대의 울타리에서 생활하면서 출근길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정이 들었으니 이런 소감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예롭게 정년을 맞은 것에 대해 하나님과 연세의료원 전 식구의 보살핌 덕분”이라며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위암에서 출발해 대장직장암분야까지 종양외과학을 두루 섭렵하며 종양외과학을 개척하고 한국사람이 많이 걸리는 소화기암의 표준진료화와 최신 요법의 개발로 국내 암연구를 국제적 수준으로 격상시키는데 진력해 온 민 교수는 8월말 정년이후 9월부터 송도병원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송도병원은 양성 대장질환의 12%정도를 진료할 만큼 대장항문전문병원으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나 대장항문 분야에서 최고로서의 자리를 목표로 연구쪽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민 교수를 모셔갔다.

“후배들과 제자들이 잘 꾸려나가고 있는 병원에 자칫 거추장스러운 일이 될까” 저어해온 민 교수는 선배 김광연 박사의 권유로 마음을 움직였다. 민 교수가 존경하는 일본 대장 직장수술의 개척자 가츠다미 박사가 80세가 넘어서도 외과의사로서 손을 놓지 않는 것도 큰 용기를 주었다.

민 교수가 외과의사가 된 사연은 이색적이다. 민 교수가 졸업하던 시절엔 의대를 마치고 미국으로 많이들 건너갔다. 학창시절 부터 벼락공부 체질이던 그는 인턴으로 남은 후 군을 마치고 미국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인턴 당직실에서 미국 ECFMG시험을 준비하느라 짬짬이 책을 들여다 보았고, 늘상 책을 끼고 공부하는 그의 모습이 외과 교수들의 눈에 띄어 발탁됐다는 것.

국내에서 개심술을 첫 시술해 명성을 날린 연세의대 홍필훈 교수는 당시 명강의와 뛰어난 수술 술기로 외과의사의 전범과도 같은 존재였다. 민 교수는 레지던트 4년차때 감히 “홍필훈 교수를 꺾겠다”는 외과의사로서의 야망을 불태웠다. 민 교수식 표현으로 `건방진 이 생각'이 위암에서 대장항문암분야까지 두루 섭렵하며 진료와 연구, 후진양성에서 큰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민 교수는 작년 7월 모국을 찾은 스승 홍 교수에게 레지던트 때의 건방진 야심(?)을 털어놓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민 교수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존경하는 사람을 모방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항시 모범을 보여주여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해 오기도 했다.

70년부터 연세의대 외과학교실 교수직에 몸담은 민 교수는 처음엔 위암쪽에 매진했다. 77년 일본 동경 암연구회 병원 및 국립암센터에서 연수하며 일본 외과계의 제 1인자 가츠다마 교수에게 직접 술기를 배우면서 위암 수술 술기의 차원을 높였다. 78년∼79년에는 미국 뉴욕 케터링 기념 암센터 및 엠디 앤더슨 암센터에서 연수의 기회를 얻어 위암과 대장직장암 분야의 새로운 학술적 이론을 도입해 세브란스뿐 아니라 국내의 외과종양학의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이 시기를 민 교수는 “새로운 술기를 배우는 기회도 됐지만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 됐다”고 회상한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위암 분야는 후배 노성훈 교수가, 90년대 들어서는 대장직장암 분야는 김남규 교수가 승계하면서 두 사람이 각 전공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해 민 교수로선 마음 든든하다. 민 교수는 91년부터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를 4년간 맡으면서 세부전문분과를 과감히 도입해 교실의 연구와 진료능력을 향상시켜 세브란스병원 외과학교실이 국내 선두주자로서 위치를 갖도록 이끌어왔다.

또 연세암연구소 소장, 연세암센터 원장직을 역임하면서 암환자등록사업과 암조직은행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설립, 암연구의 풍부한 자원을 마련해 연세의대와 연세의료원의 암진료와 암연구사업에 큰 족적을 남겼다.

민 교수는 학생강의 때 “의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고 늘 강조한다. 또 외과의사로서 대가가 되려면 의학적 지식과 수술 술기뿐 아니라 여러 방면의 지식이 풍부해야 함을 늘 강조해 왔다.

수술 전 모든 검사를 철저하게 준비해서 환자의 배를 열고 수술에 들어 가도 상황은 반전될 수 있다. 제한된 시간안에 수술에 성공하려면 공학, 기초과학 등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이 뒷받침된 올바른 판단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민 교수는 `외과학을 의학의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며, 더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고 있다.

외과의사로서 어느 때 행복감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민 교수는 몇 년전 런던 타임즈에 나온 칼럼을 예로 든다.

“외과의사가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휴게실에서 휴식을 맛보는 순간을 산모가 힘들게 어린애를 낳고 처음 젖을 물리는 순간과 비교한 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우리 외과수술방은 특히 분위기가 좋았는데 수술이 끝난후 간호사가 타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며 담배를 피워 물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민 교수는 이 휴식시간에도 그날의 수술을 다시 상기시키며, 실수가 없었는지 꼼꼼히 점검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민 교수는 “외과의사는 말 한마디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는 희망을 줄 수도, 또는 불행을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로 무수히 많은 수술을 했지만 지금도 수술부위의 꿰맨 자리가 치유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함을 느끼고 치유의 과정에서 환자의 의지력이 핵심적임을 느껴온 민 교수는 환자들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대한외과학회 회장, 대한대장항문학회 회장, 대한암학회 회장, 대한위암학회 회장, 대한암협회 이사장, 복지부 암정복 추진위원회 위원, 과학기술 총연합회 총괄이사 등 주요 직책을 맡아 외과학발전과 더불어 보건의료발전에도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2001년에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최고 등급인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가 수여하는 `과학기술훈장 혁신상'을 수상했다.

민 교수는 2000년 일본 외과학회 100주년때 일본외과학회의 초청을 받은 일을 잊을 수 없다. 당시 기념연회에 황태자부부가 나와 “밤 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나와 열심히 수술을 해 준 덕택에 일본 국민이 세계 제1의 장수국이 됐다”는 축사를 했다. 또 후생성 장관이 나와 100주년 기념 우표를 증정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본 고위층 인사들이 외과의사라는 전문직을 어떻게 보는지를 단적으로 읽을 수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의사들의 권위가 하락되어 가는 국내 현실에 아쉬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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