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재 공보의(경기도립파주병원 응급의학과)
최근 일산의 한 피부과 의사가 치료 결과에 앙심을 품고 들어온 환자로부터 복부에 칼을 맞아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같은 상황이 일어날 뻔 한 긴박한 상황이 있어 글을 적는다.
몇 년 전부터 매주 한 번씩 두 시간 정도를 할애해 무료진료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응급실이 있는 곳은 아니어서 대신 내과 외래진료를 맡고 있고 외래진료는 익숙지 않아 환자들을 기다리게 할 때도 있다.
보통 무료진료소에 내원하는 환자들은 건강보험이나 의료보호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각지대의 분들이라 정신과 질환, 알코올 의존이 심한 분들도 많고 불규칙한 생활로 여러 만성질환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조금 일찍 와서 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진료실에 앉아 접수 순서대로 환자를 보던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디 불편해서 오셨어요?"
인사하면서 보니 환자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앉아서 뚫어지게 나를 보고 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는지 얘기를 해주세요."
하니 말없이 차트를 가리킨다. 차트에는 위염약 받은 기록 외엔 없는 상태….
다시 한 번 어디 아파서 왔냐하니 속이 아파서 왔는데 차트 보면 딱 알아야지 왜 자꾸 물어보냐고 한다. 배를 진찰해보자 하면서 여기 아프냐 물어보니 대답이 없고, 다시 물어보니 그걸 꼭 얘기해야 하냐 하고….
술을 드셔서 진찰이 안 되는 상황이니 내일 술 깨고 다시 오셔서 진료를 보시자고 설명했다. 그러자 금방 교도소를 들어갔다 나왔는데 또 열 받게 해서 교도소를 다시 가야겠고 하면서 품에서 천천히 뭘 꺼낸다.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것은 덮개가 덮인 과도….
이어 과도를 내리 잡더니 덮개를 풀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 환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에 일단 양 손목을 잡고 칼을 빼앗을 수 있었다. 결국 술 마신 상태에서는 진료 안된다고 설명하고 내일 다시 오라 한 뒤 다음 환자들의 진료를 위해 다른 봉사자에게 인계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이어 오래 기다리던 다른 환자들을 보던 중이었다. 밖에서 다투는 듯 한 소리가 나기에 무슨 소리인지 들어보니 진료가 늦어진다며 한 환자가 항의를 하고 있다. 곧 그 환자 순서가 되어 성함을 부르니 이분도 내원 전 한 잔 하신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들어오면서 다짜고짜 소리를 지른다.
한 명 진료 보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고 앞에 칼든 놈 진료하는데도 그렇게 오래 걸리니 자신을 포함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진료가 늦어지는 것 아니냐며 항의했다. 칼 맞을 뻔 한 당사자는 겨우 마음 추스르고 진료보고 있는데 이건 또 웬일이냐 싶어 억울한 마음이 앞선다. 잘 달래서 설명하고 원하는 혈압약 처방하고 나니 술 취해서 소리 질러서 죄송하다며 다시 순한 양 모드가 됐다.
진료실에서의 폭력 문제는 사실 드물지 않다. <의협신문> 기사에 따르면 의사의 63.1%가 진료실에서 직접적인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기물 파손 등 간접적 폭력까지 포함하면 무려 95%가 진료실에서의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운이 없어 당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외래에서 겪은 폭력문제로 기억나는 건 실습학생으로 외래 참관수업 당시 산부인과 수술 후 장기 입원중인 환자의 남편이 술을 마신 상태로 들어와 교수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것을 레지던트 선생님이 달려와 말렸던 기억이 있고, 비뇨기과 환자가 진료에 앙심을 품고 진료했던 교수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병원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여 뉴스에 나왔던 기억도 생생하다.
특히 응급실에서는 그 빈도가 더 흔하다. 매일 밤 술 취해서 119에 실려 오는 환자들이 얼큰하게 취한 기분에 의료진에 폭언·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온 몸에 문신을 한 조폭 환자가 칼에 다쳐 와서는 진료에 협조를 안하며 폭력을 휘둘러 경찰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더 심각한 것은 경찰이 와서야 조용해진 환자 앞에서 경찰은 의료진과 환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듣더니 "쌍방과실인 것 같은데 지금은 환자가 조용한 상태이니 그냥 치료하고 돌려보내라"고 할 때이다.
이럴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물론 의료진이겠지만 옆에서 치료 중이던 다른 응급환자들에게도 고스란히 그 피해가 전가된다. 폭력상황에서 모든 응급실 진료는 마비되기 일쑤이고 당장 사용해야 할 컴퓨터 등 집기들이 파손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건 보상이나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바로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인질극에 다름 아니다. 듣기로 환자단체라는 곳에서 의사의 불친절이 폭력의 원인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이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특히 폭력사태의 피해자가 의료진뿐 아니라 환자도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는지 믿기 어렵다. 또한 설사 불친절한 의사가 있어 환자 보호자의 기분이 상했다 하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 항의해야 다른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여러 채널을 통해 환자와 의사의 믿음 관계가 개선돼 서로 존중하는 입장으로 진료를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