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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청진기 아저씨

청진기 청진기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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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9.1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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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비가 갠 상쾌한 아침이다. 영아원 아이들이 유치원에 간다.

"안녕하세요?" 한 아이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가까이 보니 낯익은 얼굴이다. 진료실에 들어오면 곧잘 우는 울보 한솔이다.

"누군데?" 함께 걷던 아이가 궁금한지 묻는다.
"우리 병원에서 일하는 청진기 아저씨야." 울보는 나를 쳐다보고 아는 척 씩 웃는다.

'청진기 아저씨'라. 그가 무심코 던졌을 네이밍에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낯가림이 심하고 겁이 많아 진료실에만 오면 울던 아이가 어느새 나를 그렇게 눈여겨 살폈던가.

이젠 가진 건 달랑 70cm, 150g 되는 청진기뿐. 어떤 권력· 벼슬· 명예· 재물과도 거리가 먼, 진료실의 내 모습이 어린 그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살아온 세월 중 절반은 청진기를 지니고 살았다. 출근하면 진료실 책상위에서 밤새 주인을 기다리던 청진기를 챙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청진기는 내 분신이다. 환자의 아픈 소리를 듣는 신체의 일부인 소중한 귀이다. 청진기는 의사의 상징이며, 내 삶의 도구인 셈이다.

의사가 청진기를 사용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프랑스 병리학자 라에네크가 우연한 기회에 청진기를 발명하지 않았으면 지금 나도 히포크라테스처럼 귀를 환자 몸에 대고 진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벨이 전화기를 발명해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한 것만큼 청진기는 환자를 치료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집 짓는 목수의 망치처럼, 재단사의 가위처럼, 화가의 붓처럼 진료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는 도구이다.

환자를 진료하는 장비는 날로 진화하고 있다.
CT· MRI· PET 같은 고급 의료기구가 대세인 요즘, 청진기의 신세는 날로 초라하다.

하지만 첨단 진단장비가 아무리 신체내부를 속속들이 투시해도 원시적인 도구로 평가 절하된 청진기의 효용가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정확도와 정밀감은 떨어져도 환자 숨소리와 심장 소리를 귀로 직접 확인하며환자와 소통한다. 생사의 확인도 청진기로 한다. 출생 시 심장소리를 듣는 것도, 이 세상을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숨소리 확인도 청진기 역할이다.

청진기로 듣는 심장소리나 숨소리는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들린다.

절구나 디딜방아 찧는 소리, 다듬이질이나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날 때도 있다. 심장이 아프면 증기기관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수돗물 새는 소리로 들릴 때도 있다. 썰물 빠지는 소리, 밀물 밀리는 소리가 얇은 가슴팍에서 들리면 심장이 상했다는 신호이다. 심하면 아이들의 입술도 새파래진다.

청진기로 듣는 들숨과 날숨소리는 대롱을 통과하는 바람소리 같이 부드럽다.

아플 때는 겨울바람이 강물을 스치고 대나무 숲을 지나가는 소리 같이 거칠 때도 있다. 눈길 위로 뽀도독대는 소리, 낙엽 밟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머리카락 비비는 소리, 목쉰 고양이 숨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다.

나자마자 엄마 품을 떠나 금방 영아원에 입소한 신생아가 건강진단을 위해 내원했다.

살갗이 가을볕에 익은 대추 같이 발갛다. 작은 가슴위에 청진기를 놓는다. 새근거리는 숨소리, 콩닥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어느 소리보다 감동적인 생명의 소리이다. 빠른 심장소리는 마치 해거름에 어미 소를 찾느라 허둥대는 초조한 송아지의 발걸음 소리 같다. 들판에 보이지 않는 어미를 헐떡거리며 찾는 망아지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 같기도 하다.

참새처럼 좁은 아이의 가슴이 팔딱거린다.

내 가슴도 두근거리며 아이의 가슴속이 궁금해진다. 이 비좁은 가슴에 얼마나 큰 꿈과 희망을 간직할 것인가. 이 작은 가슴속에 버림 받은 섭섭함을 어떻게 묻고 용서할 것인가. 세상모르는 아이는 소록소록 깊은 잠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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