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7 13:15 (토)
"자정을 포기하는 것은 투쟁을 포기하는 것"

"자정을 포기하는 것은 투쟁을 포기하는 것"

  • 이석영 기자 lsy@doctorsnews.co.kr
  • 승인 2012.09.11 17:02
  • 댓글 2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 회장 대회원 설득 노력...'반감'에서 '공감'으로

최근 인터넷 의사 커뮤니티에 '전업을 고민 중입니다'란 제목의 글이 의사들의 공감을 얻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병원 봉직의로 근무하는 글쓴이의 아내가 10년 전부터 영어 학원을 운영 중인데, 의사를 그만 두고 학원 강사로 일할까 고심 중이라는 것. 평소 의사란 직업에 자괴감을 갖고 있는 데다, 수입도 의사보다 훨씬 좋아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집사람은 의사인 내가 멋있어서 결혼했다고 한다"며 "그런데 내가 항상 의사라는 직업이 너무 싫다고 하니, 정 하기 싫으면 때려치우고 수학이나 과학 선생하면서 학원이나 관리해주면 자기도 좋을 것이라고 한다"고 털어 놓았다.

이 글을 본 의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부럽다", "뭘 고민하나? 당장 의사 그만 두라", "학원 선생 남는 자리 있으면 불러 달라", "나도 식당 차릴 준비 중이다" 등등. 간간히 '그래도 의업을 포기하지 말라'는 댓글도 눈에 띄었지만, 직업을 바꾸는데 따르는 어려움에 대한 충고였다.

전업을 고민 중이라는 의사의 고백과 이에 대한 동료 의사들의 반응은 적어도 대한민국 의사 사회에선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지난 2008년 다국적 제약회사가 북미·유럽·아시아 등 13개국 의사 174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최하위인 12위를 기록했다. 올해 3월 한국고용정보원 자료에선 우리나라 759개 직업 종사자 가운데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 44위를 기록했다. 의료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 '내 직업에 만족한다'는 개원의들의 34.1%에 불과했다. 2009년 조사보다 1.7% 떨어진 수치다.

꿈꾸던 청년 의사, 어느새 '점빵' 노예로...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은 8월 27일 고려의대생을 대상으로 한 특별강연에서 자신이 의과대학 재학 시절 한 교수로 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너희들 장밋빛 미래 꿈꾸고 의대 들어왔지? 합격했을 때 기뻤을 것이고, 밝은 앞날 생각하며 즐겁게 웃고 지내고 있지? 그런데 너희들 정말 안됐다. 의사 좋은 시대는 다 갔거든. 너희들 앞에는 어두운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노 회장은 "당시 교수의 말 보다, 나 자신이 의사 생활을 하면서 '아, 그 말이 정말이었구나' 깨달아 가는 과정이 더 충격적이었다"고 토로했다.

대한민국 의사가 환상을 깨는데 걸리는 시간은 매우 짧다.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첫 환자를 보는 순간부터 학창시절 바이블처럼 숭배하던 '해리슨'은 휴지 조각으로 변한다. 교과서의 자리는 보건복지부·식약청 고시로 대체된다. 전공의 시절엔 주당 100시간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신음해야 하며, 스탭이 되면 병원 이사장 눈치 보며 '경제적 진료'의 하수인이 된다. 응급실에서 뺨 맞는 일은 일상화 되고, 의료사고의 공포는 매일 같이 엄습해 온다.

개원을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실사·세무조사로 범죄인 취급당하고, 공단의 수진자조회는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마저 불구로 만든다. 진료비 환수와 행정처분은 대한민국 의사로 살아남기 위한 통과의례가 되었다. 리베이트 의심이 두려워 제약회사 영맨도 꺼려지고, 환자들의 늘어가는 불평·불만에 스트레스는 쌓여만 간다.

언론에선 연일 의사들의 부정·비리 사건이 보도된다. '도가니법' 시행으로 의사는 잠재적인 성범죄자로 전락했다. 환자는 줄어만 가는데 정부는 '의사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수가 0.1%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한 때 의기양양했던 청년 의대생은 어느덧 3평 점빵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정 포기 = 여론 포기 = 투쟁 포기

요즘 의사 사회의 최대 화두는 '윤리와 자정'이다. 노환규 의협 회장이 취임 직후부터 '의사들의 자정' 필요성을 강조해온 데다, 최근 의사면허 관리기구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수차례 언급하면서 의료계 내부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일부는 "지금껏 얻어맞고 빼앗기기만 했는데, 무엇을 고백하고 자정하라는 것인가?"라며 반문한다. 의료시스템의 모순에서 비롯된 왜곡된 현상들을 의사의 도덕성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의사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느냐는 울분이다.

'의사 윤리'를 둘러싼 논란 초기에는 이 같은 거부감의 정서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반감이 공감으로 치환되는 분위기다. 여기에는 노 회장의 끈질긴 설득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노 회장은 9월 들어 수차례에 걸쳐, 자정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회원들의 이해를 구했다.

그는 최근 인터넷에 올린 글을 통해 "의사들의 요구대로 제도를 바꿀 수 있으려면 여론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여론의 동조를 얻으려면 의사들의 말에 믿음이 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진정성 있는 자기반성과 통렬한 고백만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어 "자정을 포기한다는 것은 여론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의협으로 하여금) 투쟁을 포기하라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의사 자정' 논란, 넘어야 할 벽

파업 등 강경 노선을 주장하는 회원들의 시각에 대해서도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노 회장은 "많은 의사들은 '일방통행의 힘'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서 "'사회가 의사들에게 높은 윤리적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합당하다'라는 나의 주장을 회원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가장 큰 회의가 들고 힘들어진다"고 토로했다.

특히 의사 윤리를 둘러싼 내부 갈등을 '반드시 넘어야 하는 인식의 벽'이라 말하고, "(의료윤리에 대한 기존의 관점이) 견고하여 절대 무너지거나 바뀌지 않는다면 의료계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 회장의 글에 대해 한 회원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 놓더라도, 항구적인 의료제도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며 "지금이 의사들의 가장 밑바닥인데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뭐가 두렵나?"고 말했다.

이명진 전 의료윤리연구회장은 본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대부분의 의료인들은 일부 극소수의 진료실내 성범죄 동료와 비윤리적 동료들을 강력하게 징계하고 격리시키고 싶어 하지만, 왜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못하는 것인가?"라고 묻고 "문제는 썩은 부위를 도려낼 칼(권한)과 결연한 자정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이 전 회장은 "자정기능을 갖춘 전문가 단체는 윤리적으로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