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8 19:59 (일)
coverstory 청구실명제, 현대판'빅브라더' 시나리오?

coverstory 청구실명제, 현대판'빅브라더' 시나리오?

  • 고신정 기자 ksj8855@doctorsnews.co.kr
  • 승인 2012.03.09 18:16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료기관별→의료인별로 심사·평가 '패러다임' 전환
차등수가제 등 심사 정교화…관리기전 연계시 파급력 배가

Cover Story

의료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7월 시행을 목표로 청구실명제 도입계획을 구체화하고 나섰다.

청구실명제란 요양급여비용청구시 급여비용명세서에 환자를 진료한 의사의 성명과 면허번호·면허종별 등 식별정보 기입을 의무화하는 제도.

정부는 환자의 권익 신장과 청구 투명성 제고를 제도 도입의 이유로 들고 나섰는데, 의료계가 바라보는 속내는 조금 다르다.

진료의사 실명청구 전제, 명세서에 식별정보 기재 의무화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등 의료계 단체 및 시민사회단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유관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열고 청구실명제 도입 계획을 설명했다.

제도 모형은 단순하다.

진료의사 실명청구를 원칙으로, 요양급여비용청구명세서 서식을 개정해 명세서상 별도의 기재란을 만들고 여기에 진료의사와 성명·면허번호 등 식별정보를 적도록 한다는 것이 기본 골자.

급여비용 청구 등을 규정하고 있는 국민건강보험법 시행규칙만 개정하면 법률적인 절차도 사실상 마무리된다.

현행 건보법 시행규칙에서는 급여청구시 반드시 적어야 할 사항을 △가입자의 성명과 건강보험증 번호 △요양급여를 받은 자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질병 또는 부상병 △요양개시 연월일 및 요양일수 △요양급여비용의 내용 △본인부담금 및 비용청구액 △처방전 내용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복지부는 여기에 △진료한 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성명·면허종별·면허번호라는 규정을 추가해 청구실명제 근거규정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청구명세서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심평원에서 안을 잡고 있는데, 제도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EDI상 해당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의료인들의 정보를 나열해주는 방안이 유력하다.

 

*빅브라더(Big brother)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비롯된 용어로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혹은 그러한 사회체계를 일컫는다.

긍정적 의미로는 선의 목적으로 사회를 돌보는 보호적 감시, 부정적 의미로는 권력자들에 의한 사회통제 수단을 말한다.

청구명세서 작성시 진료의사가 EDI상 표기된 진료의사 명단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찾아 체크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이름과 면허번호·면허종별이 일괄 등록되는 방식으로, 의료인 입장에서는 '클릭 한번'이면 어렵지 않게 청구실명제에 동참하게 된다.

복지부, 허위 청구 방지 등 목적…의료계 "못 믿겠다"

정부는 이날 간담회에서 환자의 알 권리를 강화하고, 요양급여비용 청구에 대한 의료인의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해 청구실명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관련단체들의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이유로 국민권익위원회가 복지부에 제도개선을 권고했다는 점, 뒤이어 열린 국정감사에서 청구실명제 도입을 요구하는 국회의 목소리가 보태졌다는 점 등이 제도시행에 속도를 높여야 할 이유로 꼽혔다.

그러나 의료계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청구실명제로 환자에게 제공되는 정보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도, 허위청구를 막기 위해 실명 청구가 필요하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이재호 대한의사협회 의무이사는 "청구명세서는 말그대로 급여비용을 지급받기 위한 영수증인데, 정부가 여기에 하나 둘 항목을 늘리면서 이를 마치 보고서처럼 이용하려고 하고 있다"면서 "행정부담이 늘어나는데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이 무조건 기재항목만 늘리는 것은 행정편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이 이사는 "진료비명세서도 아닌 청구명세서에 진료의사의 이름을 적는 것으로 환자의 알 권리를 높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이고, 허위청구 문제도 수진자조회와 현지실사 등 정부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전만으로 충분히 관리 가능한 일"이라면서 "정부의 설명대로라면 청구실명제 도입으로 얻을 수 있는 정책효과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심평원이 갖게 될 '새로운 데이터'에 주목

상황이 이렇다보니 의료계는 정부가 청구실명제 도입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또 다른 복안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판단, 경계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결국 소비자 권익보호와 허위부당청구 방지라는 미명하에 진료감시를 강화하려는 의도 아니겠느냐는 것이 핵심인데, 그 가운데서도 심평원이 갖게 될 새로운 데이터의 활용방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재의 청구방식에서는 청구 데이터가 '의료기관'을 기본 단위로 쌓인다. 심평원이 보유한 기본 데이터도 의료기관별로 분절된 상태로, 이 때문에 심사와 평가업무 또한 의료기관을 기본단위로 움직인다.

심사는 각 건별로 이뤄지지만 이것이 데이터로서 의미를 가질 때는 의료기관 단위로 묶었을 때다. 항생제·주사제처방률 등 각종 적정성 평가들도 의료기관 단위의 데이터 위에서 이뤄지며, 각각의 평가결과도 의료기관을 기본단위로 해 공개된다.

하지만 청구실명제가 시행되면 심평원은 새로운 형태의 데이터를 갖게 된다.

기본 데이터의 단위가 의료기관에서 각각의 의료인으로 세분화되는 것이다. 면허번호당 하나씩, 다시말해 각각의 의사를 하나의 기본단위로 삼아 특정 의료인의 진료행위와 의약품 처방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올리는 일이 가능해 진다.

물론 홀로 개원해 있는 의원의 경우 기존 청구방식에서도 '대표자=청구인'으로 '실명 청구'를 시현하는 만큼 현재의 상태에서도 의료기관 대표자를 청구인으로 가정해 같은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만, 청구실명제는 데이터의 신뢰성을 몇 단계 이상 끌어올려 줄 수 있다.

개별파악이 불가능했던 병원 종사자들의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게 된 점은 정부와 심평원의 입장에선 이 제도의 가장 강력한 메리트인 셈이다.

의료기관별→의료인별 심사·평가 '패러다임' 전환

문제는 이렇게 쌓은 데이터를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의료계는 심평원이 현재 가진 관리기전과 직접 연계해 이의 활용범위를 넓혀 갈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새로 쌓인 의료인별 데이터를 요양급여 적정성 평가 등과 연계하는 방식.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평가기전이 의료기관별 평가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청구실명제 이후에는 의료인 각각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일이 가능해지므로 의료기관별 평가에서 나아가 의료인 개개인에 대한 비교평가 또한 이뤄질 수 있다.

과거에는 항생제를 많이 쓰는 의료기관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선에 그쳤다면 이제는 항생제를 많이 쓰는 의사, 처방전당 약품목수가 많은 의사, 제왕절개 분만율이 높은 의사를 개별 파악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항생제 많이 쓰는 의료기관을 심평원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던 것처럼, 항생제 많이 쓰는 의사의 명단을 띄우는 것도 완전히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다.

실제 소비자단체들은 지난달 복지부와 가진 간담회에서 의사의 진료량 및 진료행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환자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정감사에서 청구실명제 도입을 주장했던 최영희 의원도 "청구실명제를 도입하면 국민에게 질 좋은 의사·병원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어 장기적으로 의료서비스 질 제고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모두 청구실명제와 적정성 평가의 연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심평원 내부에서도 읽힌다.

심평원 관계자는 "소비자 알권리 보호와 청구투명화가 청구실명제 도입의 주 목적"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제도 도입 이후 정부의 판단에 따라 평가 등 관련 업무와 연계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 보험심사간호사회장은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의료인별로 정보를 쏙 뽑아내 필터링 없이 외부로 유출하는 것"이라면서 "정보가 가공되고 외부로 가감없이 유출될 경우 의료와 상관없는 분야에서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차등수가제 등 심사 정교화…관리기전 연계 가능성도

또 하나, 의료인별 정보를 현재 심평원의 심사 프로세스와 연계한다면 굳이 지금의 급여기준이나 심사기준을 바꾸지 않고도 심사업무를 보다 정교하게 꾸려나갈 수 있다.

차등수가제를 일례로 들어 A와 B 두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의원급 의료기관이 있고 이들 기관에서 하루에 진료를 받은 환자(야간 제외)가 A가 본 환자 80명·B가 진료한 환자 70명을 합해 모두 150명이라고 치자. 현재의 방식대로라면 150명을 둘로 나눠 1인당 75명씩 진료를 받은 것으로 계산, 차등수가제 적용대상에 들지 않는다.

여기에 청구실명제를 연계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각각의 이름으로 청구명세서가 들어간다면 A와 B가 각자 본 환자를 별도로 셈하여 A의사가 초과진료한 5명의 환자에 대해서는 별도로 차등수가를 적용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 청구실명제가 안정적으로 정착된다면 요원하게만 보였던 병원급 의료기관 차등수가제도 실현 가능한 일이 된다. 의료계 일각에서 청구실명제를 병원급 차등수가 적용을 위한 전단계로 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밖에 지표연동관리제 등 기관단위로 이뤄지던 심평원의 관리기전들이 의료인 단위로 세분화돼 적용할 경우 의료계가 떠안는 부담감은 배가될 수 있다.

의료기관 이름으로 발송되던 경고장이 어느 날 자신의 이름으로 날아온다면?

아직까지는 가상의 시나리오에 불과하지만, 현재 정부와 심평원이 가진 프로세스안에서 조금만 더 공을 들인다면 결코 실현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다.

신광철 대한이비인후과의사회 공보이사는 "홀로 개원해 있는 의사들은 현재에도 실명 청구를 하고 있는 만큼 제도 자체에 대한 부담감은 많지 않다"면서도 "다만 이것이 심사·평가와 연계돼 사실상 규제를 강화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의료계 또한 이 같은 상황을 우려, 복지부와 각을 세우고 있다.

이재호 의무이사는 "청구내역에 따라 의료인별 세분화가 가능해지는 만큼, 정부와 심평원이 의료인 개개인을 타깃으로 한 세세한 관리기전을 들이댈 수 있다"면서 "세분화된 청구 데이터가 심사삭감 기준으로 변질될 우려도 있어 이를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정부는 국민의 요구가 높다는 이유로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의료기관에 요구하고 있는데, 제도 변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으로부터 공급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의도 하고 있지 않다"면서 "이제는 공급자인 의료인을 위한 보호망도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정부의 자세전환을 촉구했다.

한편, 복지부는 이달 중 청구실명제 도입을 위한 건보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 5월까지 관련 규정 정비를 마무리 한 뒤 7월부터 청구실명제를 본격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