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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여성 전공의'로 사는법

coverstory '여성 전공의'로 사는법

  • 고신정 기자 ksj8855@doctorsnews.co.kr
  • 승인 2010.11.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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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공의 10명 중 9명 "성별이 선발과정부터 영향 미쳐"
남성위주 수련환경 남몰래 눈물…출산·양육 꿈도 못 꿔

 <사례 1>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꿈꾸는 A 씨. 전공의 선발 면접을 앞두고 전공의 생활에 임하는 각오와 향후 계획 등 나름대로 예상 질문과 모범답안을 짜가며 꼼꼼히 준비를 했건만 정작 면접관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면접장에서 A씨에게 쏟아진 질문은 '남자 친구가 있느냐' '결혼계획이 있느냐' '결혼하면 바로 아이를 가질 생각인가' 등이었다. A씨는 "전공의 생활을 열심히 하겠느냐는 다짐을 받기 보다는, 전공의 생활중에는 절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 위한 자리 같았다"고 했다.

<사례 2> 응급실 당직근무 중인 전공의 B씨.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취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일행 중 하나가 어디서 넘어졌는지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있다. 상처를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니 다짜고짜 "아가씨 말고 의사선생님 불러오라"며 호통을 친다.

"제기 의사예요"라며 싱긋 웃어주기까지 했건만 같이 들어온 일행들까지 가세해 "계집애 말고 남자선생 나오라고!"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취객, 더군다나 환자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동료에게 자리를 내주며 오늘도 속으로 화를 삭혔다.

 
Cover Story

'여성 전공의'가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2010년 9월말 현재 수련을 받고 있는 전공의의 숫자는 1만 6000여명. 이 가운데 35.5%인 5802명이 여성이다. '여풍'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지만, 남성 위주의 전통적인 수련방식을 유지해 온 대한민국 병원에서 이들이 살아남기란 결코 녹록치 않다.

한 여성 전공의는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병원은 여전히 남자들의 영역"이라고 했다. 흔히 전공의를 피수련자 신분에 얽매인 '약자'라고 하지만 남자들의 영역에서 사는 여성 전공의들은 전공의 가운데서도 약자에 속한다.

여 전공의 92%, '성별' 전공의 선발과정부터 영향

 

실제 여성 전공의들은 전공의 선발과정에서부터 차별을 실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자의사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의학전공 여학생과 여 전공의의 환경개선과 진료 결정을 돕기 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123명 가운데 92.1%가 여성이라는 성별이 전공의 선발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 가운데 40.3%는 성별이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고 했으며, 약간 있다는 응답도 51.6%로 높았다. 반면 별로 없다 혹은 전혀 없다는 의견은 8.1%에 그쳤다.

한병덕 대한전공의협의회 정책이사는 "전공의 선발과정에서 남성 지원자를 선호하거나 여성 지원자를 기피하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면서 "외과 등 상대적으로 체력이 많이 요구되는 과목에서는 아예 여전공의가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전공의가 과목 선택에 있어 스스로 제한을 두기도 한다고.

한 대학병원 전공의는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 전공의들이 특정과목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면서 "굳이 여성을 꺼리는 과목을 선택해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인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여피과목'들의 문턱이 더욱 높아지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면접과정에서 여성 전공의에게 유독 결혼이나 출산문제 등을 집중 추궁하는 일도 흔하다. 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을 공개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평가 기준이 전공의로서의 자질보다는 다른 면에 맞춰져 있는 듯해 찝찝한 마음을 떨치기 힘들다.

당직실·샤워실 등 생활시설 태부족…성희롱 등 위험 노출

 

전공의로 선발된 이후에도 여성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불편함은 많다.

일단 기본적인 수련환경이 열악하다는 점은 대다수 여성 전공의들이 공감하는 문제다. 여자의사회 설문에 따르면 샤워실·당직실 등 수련환경 때문에 여성으로서 병원생활에 불편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여성 전공의 85%가 "그렇다"고 답했다.

시설별로는 "당직실과 샤워실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86.4%, 85.5%에 달했고 "탈의실이나 화장실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각각 81.7%, 73.7%로 높게 나타났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 안에서 보내는 전공의들에게 먹고, 자고, 씻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당직실 부족으로 남·여 전공의가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련과정중 성희롱 또는 성추행에 노출되는 위험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의사회에 따르면 여성 전공의 가운데 20%가 본인이 직접 성희롱 또는 성추행을 경험했다고 밝혔으며, "다른 사람이 성추행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응답도 27%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의 성희롱 또는 성추행 경험을 들은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무려 44%가 "그렇다"고 답했다.

성희롱 또는 성추행 상대로는 교수·전문의가 46%로 가장 많았으며, 상급 전공의 33%, 동료전공의 10% 등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응급실이나 병실에서 환자에게 모욕을 당하는 사례도 있다. 응급실 취객은 단골손님이고 요도 카테타 삽입 등 진료행위 중 여전공의에게 시덥잖은 농을 걸어오는 환자들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 전공의는 "응급실의 경우 밤이나 새벽시간에 취객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희롱을 당하는 등 지저분한 일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다"면서 "화도 나고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어 대부분 그저 화를 삭히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이와 관련, 여자의사회측은 "여전공의들은 교육 및 근무상황 등에서 성희롱 및 성추행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면서 이에 대한 상담이나 교육, 성희롱 및 성추행을 당했을 경우 도움을 줄 수 있는 부서나 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성' vs '전공의' 선택을 강요받는 사람들

 

한편 여성 전공의들은 임신·출산 문제와 관련해 타의에 의해 '여성'과 '전공의' 가운데 한가지 역할만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기도 한다.

나이대로 보자면 수련기간 중 결혼과 임신이 자연스런 일이지만, 늘상 시간에 쫓기는 현행 수련시스템 안에서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대체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여서 한 사람의 공백이 곧 동료의 업무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수련기간 중의 임신은 재앙에 가깝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C씨의 사례는 현재 임신·출산과 관련한 여성 전공의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마취과 전공의였던 C씨(2년차)는 신경차단술이나 신경외과 수술중 C-arm 등 방사선 노출이 심한 작업을 반복하는 일이 태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임신 4개월 무렵 병원에 스케줄 변경을 요청했다. 그러나 의국에서는 대체인력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C씨는 건강한 출산을 위해 결국 병원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출산 준비와 출산 이후 관리도 쉽지 않다. 물론 제도적으로는 90일 출산휴가가 보장돼 있지만, 수련중인 여전공의들이 이를 꽉 채워 쉬는 경우는 드물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전공의 수련제도 개선을 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 전공의 402명 가운데 90일의 법정 출산휴가를 모두 채운 사람은 18.9%에 불과했다.

응답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45~90일 미만의 휴가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한달도 채 쉬지 못했다는 응답도 6.7%나 됐다.

여자의사회의 조사에서도 무려 94%에 이르는 전공의들이 "출산과 육아가 진로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전공의협의회 관계자는 "피수련자라는 신분 때문에 결혼과 임신, 출산이라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특히 일부 수련병원에서는 업무공백을 우려해, 전공의 선발시 여전히 여전공의들에게 '결혼 및 임신 금지 서약'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임신과 출산문제에 있어 "가장 근복적인 해결책은 전공의 업무량의 축소"라면서 "전공의들이 동료에게 죄 짓는 심정으로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업무량 축소와 대체인력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차별' 말고 '차이'를 인정하자

 여성 전공의 비율이 40%에 육박할 정도로 올라갔다는 것은, 병원의 여성 전공의 의존도도 그 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전공의에 대한 병원의 배려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남성 위주의 전통적인 수련방식 속에서 많은 전공의들이 여러가지 권리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수련제도의 개선과 함께 의료계 스스로 여성 전공의의 위치와 역할을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병덕 전공의협의회 정책이사는 "여전공의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병원은 물론 전공의 사회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배려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라면서 "수련제도의 개선과 함께 '차별'이 아니라 남녀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인식개선운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없겠지만 남성위주의 전통적인 수련과정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보다 여성 친화적인 수련과정이 설계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면서 "인식개선 캠페인과 더불어 여성전공의 생활시설 및 안전시설을 병원 평가 항목에 추가하는 등, 여성 전공의의 편의를 제고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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