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7 06:00 (토)
coverstory 학술대회장에 '부스'가 사라지고 있다

coverstory 학술대회장에 '부스'가 사라지고 있다

  • 이현식 기자 harrison@doctorsnews.co.kr
  • 승인 2010.04.16 11:20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경쟁규약 불확실성 여파로 20~30% 감소
제약협회 심의위원회에 권한 집중...학술발전 치명타 우려

▲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Cover Story

다음달 6일부터 시작되는 대한당뇨병학회 춘계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박중열 총무이사(울산의대 교수)는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제약사 부스(booth) 유치가 힘들어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올해는 20%가량이 더 줄었기 때문이다.

이번 춘계학회에서는 당뇨병과 관련해 미국과 스웨덴의 해외 연자를 초청하고 17개 심포지엄과 진료지침 공청회 및 포스터 발표 등 알찬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박 교수는 "학술대회를 치르는 데 부스비나 광고비만으로는 충당이 안 되니까 후원을 받고 있는데 관련 규정상 목적에도 부합해야 하고 요건도 까다롭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이어 "그나마 이번 춘계학회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가겠지만 다음 학회부터가 정말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대한개원내과의사회 춘계학술대회장에도 부스가 지난해보다 30% 가량 줄었다.

지난해 50개 정도 되던 부스가 올해는 35개를 넘지 못했다. 김일중 회장은 "그나마 4월 중에 열리는 학술대회는 이미 계약이 체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행이 가능했지만 6월부터는 정말 힘들 것 같다"고 예상했다.

그는 "보통 3개월 전부터 학술대회를 준비했는데 업체들이 3개월 전에는 한국제약협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이젠 6개월 전부터 학회 준비를 시작할 예정"이라며 "학술대회를 준비하는 입장에선 이전보다 일찍 계획을 짜서 업체와 협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4월 1일부터 시행된 '의약품 거래에 관한 공정경쟁규약'의 여파로 학술대회장의 부스가 사라지고 있다. 공정경쟁규약만 보면 제약사가 부스 설치를 하는 데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분기별로 제약협회에 '사후신고'만 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 의료계 현장에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정경쟁규약의 '불확실성' 때문에 피해가 커지고 있다.

이는 규약에서 모든 사항을 명시하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규약 시행 초기에 공정거래위원회 단속의 '시범케이스'가 되지 않기 위해 제약사들이 눈치작전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원활동 중 어떤 것은 허용되고 어떤 것은 처벌대상인지 관행이 정립돼야 이러한 불확실성이 해소될 전망이지만, 이러한 과도기에 의학 학술발전에 전념해야 할 학술단체가 고스란히 피해를 뒤집어쓰고 있다.

비현실적 공정경쟁규약 학술활동 '위축'

몇해 전부터 경기불황과 세무처리 문제로 학술대회 부스 유치가 어려워지기 시작했지만, 올해는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돼 있다. 설상가상으로 현재 공정경쟁규약 시행 '초기'인 만큼 앞으로는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당뇨병학회나 개원내과의사회처럼 약 처방을 많이 하는 내과계열 학술대회도 큰 어려움을 겪을 만큼 부스 유치는 학술대회를 여는 의학 학술단체의 공통적인 골칫거리다. 외과계열 학회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장석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은 "많이 어렵다"고 했다. 지난해 산부인과의사회 춘계학술대회에는 65개 정도의 부스가 참여했으나 18일 열린 올해 행사에는 49개로 약 25% 줄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굉장히 선방한 축에 속한다.

장석일 부회장은 "제약사들이 공정경쟁규약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몸을 지나치게 사리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정경쟁규약의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제약사의 지원 활동 가운데 긍정적인 부분은 더욱 진작시키고 부정적인 부분은 선별해 해소해야 한다"며 "'의료계가 힘들어야 나머지 국민이 행복하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이나 제약사의 지원이 무조건 잘못됐다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학회의 존폐마저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올해 3월 7일 한양대 HIT에서 창립총회 및 첫 학술대회를 연 대한노인재활의학회는 당초 예정보다 학회 출범시기를 앞당긴 사례다.

노인재활의학회는 최근 요양병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긴 데 대해 정도관리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하는 등 의료계 발전에 꼭 필요한 업무를 수행할 학술단체이지만, 최근 스폰서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발족 자체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나마 4월 이전에 출범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 몇 달 앞당겨 창립총회를 열었다.

"부스가 '홍보'활동이지 리베이트냐"

공정경쟁규약이 시행되면서 명분이야 어떻든간에 의학적인 학술활동이 위축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의료계에서는 재원 없이는 학술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학술대회장에 설치하는 부스는 제약사나 의료기기업체가 자사의 제품을 '홍보'하는 곳이다. 이러한 '광고' 목적의 홍보는 시장에 맡겨야 할 일이지, 불법적인 리베이트마냥 엄격한 규제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부스 설치의 허용 기준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다. 학술대회마다 규모와 기간이 제각각인데 지원 한도를 고작 600만원으로 제한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면 하루동안 진행되고 300명이 참석하는 학회와 4일간 3000명이 참여하는 학회는 다른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경쟁규약 세부운용기준 제14조에 따르면 제약사는 학술대회에 원칙적으로 하나의 부스만 200만원을 기준으로 설치할 수 있고, 학술대회의 성격·규모·참가인원 등에 따라 최대 2개까지 각각 300만원에 총 600만원까지로 제한했다.

기껏해야 200만원 한도를 600만원으로 늘린 것인데, 기존 메인스폰서의 경우 2000만원도 흔했던 점을 고려하면 현실과의 괴리를 메우는 데 한계가 있어 보인다.

학회 마음에 안 들면 기부 '취소'

공정경쟁규약의 모순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기부금'과 관련해 제약사가 대상 학회를 직접 지정할 수 없도록 한 '비지정기탁제'와 기부 대상 학회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기부 의사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기부대상 선정의뢰 철회권'이다.

규약 제8조에 따르면 사업자(제약사)는 학술단체에 기부하기 60일 전에 기부 대상 선정을 제약협회에 의뢰해 제약협회의 결정에 따라 기부하도록 돼 있다. 즉 기부금 수혜를 받을 학회를 결정하는 권한은 기부를 하는 제약사가 아니라 제약협회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제약협회는 기부대상을 정할 때 제약사의 기부 목적을 존중해야 한다는 추상적 의무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제약사 관계자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다는 사항만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지정기탁 방식의 기부금제도는 기부하는 제약사와 기부금 수혜대상인 학회와의 연결고리가 약해 제약사들의 불만을 샀다. 그래서 공정경쟁규약은 제약사에 기부대상 학회에 대한 결정을 본 뒤 기부 의사를 번복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규약 세부운용기준 제5조는 제약회사가 제약협회의 기부대상 결정에 이의가 있는 경우 기부대상 선정의뢰 신청을 철회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면 제약사는 내과계열 학회에 기부하고 싶은데, 기부대상 학회가 기초의학분야나 외과계열로 정해질 경우 그러한 통고를 받은 후 5일 안에 기부 의사를 취소해버리면 끝이다.

손 놓고 있는 보건복지부

공정경쟁규약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주도로 시행되면서 의료계의 학술활동에 만만찮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지만, 주무부처로서 학술·연구단체의 활동을 지원해야 할 보건복지부는 여기에 신경을 못쓰고 있는 모습이다.

복지부 의약품정책과 관계자는 향후 대책을 검토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공정경쟁규약에 대해선 공정위에 문의하라"며 "의약품정책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기 때문에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소관업무가 아니니까 고려할 대상도 아니라는 식이다.

공정경쟁규약을 둘러싼 논란이 가속화되자 대한의학회는 16일 운영위원회 안건에 올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김숙희 홍보이사는 "지난해 회원 학회를 위한 세무가이드라인 책자를 발간한 데 이어 올해도 상황을 주시하며 대책을 고려 중이다"며 "앞으로 여러가지 대응방안을 검토하게 될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학회 '법인화' 바람 거세

한편 학회들은 부스 감소에 따른 재정적자를 기부금으로 보전하기 위해 법인화에 나서고 있다. 현재 대한의학회 정회원 학회 148곳 가운데 재단법인 9곳과 사단법인 8곳 등 총 17개 이상의 학회가 이미 법인 등록을 마쳤다<표1>.  

학회명 법인형태
대한내과학회 재단법인(한국내과학연구지원재단)
대한노인병학회 재단법인(학술진흥재단)
대한당뇨병학회 재단법인(당뇨병학연구재단)
대한미생물학회 사단법인
대한면역학회 사단법인
대한류마티스학회 재단법인(류마티스연구재단)
대한비만학회 사단법인
대한소아과학회 재단법인(한아재단)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재단법인(대한소화기내시경연구재단)
대한신경외과학회 재단법인(대한신경외과학회연구재단)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단법인(대한정신건강재단)
대한영상의학회 재단법인(한국방사선의학재단)
대한의료정보학회 사단법인
생화학분자생물학회 사단법인
한국농촌-지역보건학회 사단법인
한국의학물리학회 사단법인
한국항공우주의학회 사단법인

 

 

또한 법인 전환을 추진 중이거나 고려 중인 학회도 21곳 이상에 달한다<표2>.

대한간학회 법인화 검토
대한골대사학회 법인화 검토
대한성형외과학회 재단법인 추진(공동으로)
대한미용성형외과학회
대한바이러스학회 법인화 추진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 법인화 추진
대한세포병리학회 법인화 추진
대한소아소화기영양학회 법인화 검토
대한신경과학회 재단법인 검토
대한심장학회 재단법인 추진
대한외상학회 사단법인 검토
대한음성언어의학회 법인화 검토
대한응급의학회 사단법인 추진
대한이비인후과학회 법인화 검토
대한이식학회 법인화 검토
대한진단검사의학회 법인화 추진
대한피부과의학회 법인화 추진
대한흉부외과학회 법인화 추진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법인화 추진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법인화 추진

아직까지는 대다수 학회가 '사업자등록증'으로 세금 처리를 하고 있다. 학술대회·세미나 관련 광고 또는 부스는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이기 때문에 학회들은 사업자등록증을 교부받아 세금을 신고하고 있다. 즉 법인이 아니라도 세금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사단법인이나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 유리한 점이 많다. 대한의학회가 발간한 세무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사단·재단법인으로 설립된 학회는 기부를 받을 경우 기부자가 기부금 공제혜택을 받을 수 있어 출연이나 기부를 받기가 수월하다.

반면 법인 등기를 위해선 일정한 요건을 갖춰 주무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허가 요건이 상당히 까다로워 학회들이 애를 먹고 있다.
 
"학술활동 제약협회 손에 목맬 수 없다"

현 공정경쟁규약에 따를 경우 의학계의 학술대회는 제약협회 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일희일비할 가능성이 높다. 이 심의위원회는 제약업계 대표 5명과 시민단체를 비롯한 다른 영역의 대표 6명 등 총 11명의 '비상근' 위원들로 구성되는데, 제약사의 지원 활동과 관련한 사전신청의 심의와 허가·사후보고 검토·규약 위반에 대한 고발권 등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

제약사들이 모여 만든 제약협회에 의학계 학술발전의 운명을 내맡기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료계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