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6 16:44 (금)
[신년특집 좌담회]틀을 깨라! 생각을 그려라

[신년특집 좌담회]틀을 깨라! 생각을 그려라

  • 최승원 기자 choisw@kma.org
  • 승인 2009.12.31 12:49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 : 김영숙 의협신문 취재팀장
패널 : 안덕선 고려의대 교수(의학교육학)
    이병훈 아주대 교수(인문학)
    전우택 연세의대 교수(의학교육학)
    서 민 단국의대 교수(기생충학)

의협신문이 '의학, 상상력을 만나다'를 주제로 좌담회를 개최하고 특별기고를 싣는다. 의학과 상상력이 만나면 의학계와 의료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좌담회에 참석한 패널들과 전문가들은 앞다투어 그 효과를 무지개빛으로 그리고 있다. 아니, 무지개빛 전망을 넘어 상상력이 배제된 의학, 상상력이 배제된 의료로는 더이상 다가올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왜, 시대는 의학 혹은 의료에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나? 왜, 의학과 다양한 학문과의 통섭을 도모해야 하나? 의학계와 의료계의 일선에서 온몸으로 상상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전문가들로부터 의학과 상상력의 만남이 가져올 의료계의 즐거운 미래를 '상상'해 본다.

이번 기획에는 연세의대와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가 함께 했다. 연세의대와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는 지난달 초 심포지엄 '의학적 상상력, 의학의 미래를 열다'를 개최했으며 의학과 상상력의 만남을 주제로 책 <의학적 상상력, 의학의 미래를 열다>를 출간할 예정이다.
 
[패널 약력]
▲안덕선 고려의대 교수(의학교육학): 성형외과 전문의. 인문학과 교육학 등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커 고려의대에서 성형외과와 의학교육학과를 동시에 책임지고 있다.

▲이병훈 아주대 교수(인문학): 러시아에서 러시아문학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서 의대생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연세의대에서 실험적으로 도입한 '의학과 문학' 커리큘럼을 디자인했으며 가톨릭의대를 거쳐 아주의대에서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의학과 문학>, 번역서로는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전우택 연세의대 교수(의학교육학): 정신과 전문의. 연세의대 학생부학장. 의학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의학교육과를 책임지고 있으며 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과 의학과의 통섭을 시도하고 있다.

▲서 민 단국의대 교수(기생충학): 기발한 상상과 발상으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의학저술 등을 선보이고 있다. 저서로는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기생충 살인사건> 등이 있다.

사회: 상상력은 인류문명 발전에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근대의 개막 이후  상상력이 오랫동안 질식돼 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들어 상상력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심지어 의학에서도 상상력이 거론되고 있다.

왜 상상력이 화두가 되고 있나? 학문적·경제적·사회문화적 요인이 있을 것 같다.

 

 

 

이병훈: 우리 세대는 생산성을 강조하는 시대였다. 이제는 창조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인 것 같다. 'productivity' 시대에서 'creativity' 시대로 가는 것이다. 중세에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갈 때 인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했다.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듯이 지금 시대가 'creativity'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러 학문들의 소통·융합이 강조되고 언급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르네상스의 꽃은 과학과 예술·인문학의 만남이었다. 과학과 인문, 예술을 융합시키는 상상력이 부재했다면 애초부터 르네상스는 불가능했다.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고 그 시대적 요구에 상상력으로 응답한 것이다.

사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면서 생산성은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강조됐다. 하지만 '생산성'만 가지고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이제 시대가 새로운 동력을 요구하고 있다. 의학을 포함해 과학과 예술, 인문학을 그때처럼 융합해서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안덕선: 상상력이란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고 비판적인 날카로운 생각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보여준 광기, 이를테면 광우병 사태·황우석 신드롬 등은 불안이 본질을 덮은 케이스다. 실제 광우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광기와 싸우는 것이었다. 건강하고 건설적인 사고력을 키우는 튼튼한 상상력이 우리 사회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의학도 마찬가지다. 근대의학의 도입 배경에는 식민주의적 군사문화가 있었고 그 전에는 성리학을 주축으로 한 보수주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체주의적인 국가시스템이 자리를 잡았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 수 없는 분위기가 됐다.

이제는 근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창조력이 필요한 시대라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근대성을 획득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고 본다. 상상력과 생각하는 힘을 바탕으로 전근대적인 우리 문화나 교육환경부터 개선해야 한다.

사회: 의학적 상상력이란 무엇이고, 의학발전과 의학사에 어떻게 작용해 왔나? 또 임상 의사로서 상상력이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전우택: 인간의 몸에 무언가를 가하는 행위인 의학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보수적 특성을 갖게 된다. 의대생이 상상력을 발휘해 답안지를 작성하면 낙제할 가능성이 크다. 의사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의학과 상상력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상상력을 배제하는 의학의 전통이 의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

의학이론과 임상현장 사이에는 틈이 있기 마련인데 틈을 극복하는 방법은 의학적인 상상력을 키우는 거다. 교과서적으로 아픈 사람은 없다. 교과서적 이론만 갖고 임상을 하다 보면 유능한 임상의가 되기 힘들다. 노련한 의사는 경험을 통해 상상력을 키우고 이론과 임상 간의 간극을 메워간다.

환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 역시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환자가 우울해하는 것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기 힘들다.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면 공감이 가능하다.

탁월한 연구를 위해서도 의학적 상상력은 중요하다. 1930년대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존 스노우는 환자의 주거지를 점으로 표시하면서 오염된 상수도가 원인임을 규명했는데 바로 이것이 역학의 출발이었다. 그 당시 의학수준으로 볼 때 정말 획기적인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의학적 상상력으로 도약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타학문과의 연계를 위해서도 상상력은 필요하다. 의학은 물리학·화학·유전학 등 다른 영역에서 개발된 것을 환자에게 적용하면서 발달한다. 의학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의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강력한 상상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의대생에게 의학공부에 대한 강한 동기를 심어주기 위해서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의학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흥분과 전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의학공부에서 의학적 상상력이 작동하도록 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이유들로 상상력은 의학과 의사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사회: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괴리가 문제되고 학문간 통섭이 이야기되는 마당에 상상력에 굳이 의학적, 인문학적 이란 수식어를 붙여 구분한다는 것이 다소 모순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어느 정도의 차별성은 있어야 하지 않나?  예를 들어 문학적 상상력이 보다 무한 자유라면 의학적 상상력은  다소의 책임이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안덕선: 인문학적 상상력과 의학적 상상력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상상력, 이를테면 소설을 읽으면 우린 간접 경험을 한다. 소설 등 인문학적으로 설정된 여러  상황을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환자의 다양한 상황을 임상의사가 간접 경험을 통해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만으로, 혹은 질병의 경험만으로 좋은 진료를 할 수 없다. 사람을 경험해야 한다. 결국 인문학적인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을 다루는 의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충족시키는 거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의학은 궁극적으로 윤리와 만나게 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의학을 윤리의 부분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이병훈: 상상력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상상력 즉, 'Imagination'의 어원은 라틴어 'Imago'에서 나왔다.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한마을에 평생을 살았다. 만나는 사람이나 보는 것들이 늘 제한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릴 수 있는 게 한정돼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보고, 경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상상력이란 이렇게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을 의미한다. 의대생들이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도록 자극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연세의대에서 강의를 할 때 느꼈던 보람은 의대생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또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있는 경험이나 동기를 줬다는 거다. 의대생이라고 인문학적 상상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균적으로는 뛰어나다. 그런데 그게 평균이다.

다른 전공 학생들의 경우는 편차가 심하지만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가 있나"하면서 감탄하게 하는 유별난 학생들이 있는데 의대생들에겐 그런 기발함이 없었던 것 같다.

안덕선: 의대에서 과학만 가르치면 과학적 담론에는 익숙하지만 환자를 만나서 질병을 경험하는 것에서는 개인적인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이 하는 활동들, 즉 문화나 예술, 종교, 철학 등을 공부하다보면 그 사람에 대한, 또는 다른 인생에 대한 상상력이 생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상상할 수 있다. 과학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학생들에게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군에게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수지식만 가지고는 힘들다. 일반지식 즉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사회: 소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상상력은 '타인과 공감하는 힘이다'라는 말을 했다. 환자를 다루는 의사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사들의 공감 능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결국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의학교육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안덕선: 공감 능력을 키워 보려고 의대가 '의료와 대화' 같은 과목을 학점화해서 시도하고 있다. 최소한 환자를 볼 때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도의 기계적인 것은 가르친다. 하지만 실제 공감을 하려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매우 힘들다. 우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한다.

학력도 생활배경도 다 다르다. 심지어 똑같은 질병을 앓지만  나타나는 증상도 다르다. 끈질기게 상상하지 않으면 공감하기가 참 어렵다. 진정한 공유를 하려면 문학작품에서 그려진 의사와 환자의 모습이나 경험을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술작품을 보고 해석을 잘하는 사람의 경우 환자를 보고 해석하는 능력이 역시 남다르다. 넓은 의미에서의 인문학인 예술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이병훈: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이런 방법은 어떨까? 미국 노스웨스턴의대에서 의대생에게 영문학을 강의하는 몽고메리 카운터는 코난 도일의 탐정소설 <셜록 홈즈>시리즈를 강의 시간에 읽게 했다. 진단을 내릴 때 거치는 임상적인 추론 과정과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증거들을 토대로 추리하는 수사 과정이 유사하다는 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범죄심리학에서 말하는 '단서'는 임상진단 측면에서 보면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의대생들은 홈즈가 단서를 조사하고 대안적 가설을 수립해 가능성이 높은 것들을 선택하는 과정을 환자를 진단하는 방식과 비교하며 흥미를 갖고 수업에 집중하게 된다.

의학교육을 의학적인 대상 혹은 소재로만 한정할 게 아니라 추리소설과 연계한 것이 학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다음 학기에 아주의대에서 4주 강의로 한번 해볼 생각이다.

전우택: 정신과 진단을 내릴 때 유용할 것 같다. 세균을 배양한 다음에야 결핵이다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신과적 히스토리를 잔뜩 갖다놓고 최종 진단을 내려야한다.

수업 중에 이런 얘기를 한다. 너희는 막 범죄현장에 들어온 경찰이다. 방에 흩어져 있는 증거들을 갖고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진단도 마찬가지다.

사회: 의과대학 교육과정을 보면 아직도 암기해야 할 내용은 많고, 반복되는 시험으로 상상력을 키울 여유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럼에도 서 민 교수님은 독특한 상상력으로 온·오프라인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의사양성과정에서 상상력을 억압하는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보나?

서 민: 대부분의 의사들은 만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의사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향은 의대생 때 부터 고착화된다. 예과 때만 해도 그래도 다른 전공의 친구들을 만나는데 본과에 진입하면 고등학교 때 친구 조차 만나지 않게 된다.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특권의식이나 게으름 같은 것도 원인인 것 같다. 방학 때라도 시간을 내서 다른 분야의 친구들을 만나서 교류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중에 의사가 되고나서 의사들 하고만 얘기하다보면 일정한 틀에 자신을 가두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의사들이 골프 이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의료계 외의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덕선: 의사들에겐 의국생활이란 특유의 문화가 있다. 어느 전직 교과부 장관은 의국문화를 조폭문화와 비슷하다고까지 말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동의한다.

더욱이 의국출신 동문들이나 선후배 관계가 평생 갈 수도 있다는 게 부담일 수 있다. 의국생활에서 행동의 일치도를 화합이나 조화라고 얘기하며 개개인의 삶까지 지배하게 된다. 전체주의적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사회:  안덕선 교수께서 한국 의학교육의 태생적 문제점을 지적하신게 기억난다. 서양의학이 사회적 실천으로 규명되는 것과 달리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의 계몽과 이성적 진보를 초래할 수 있는 인문학이 결여된 '과학적 의학'로 안착했고, 아직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안덕선: 우리의 슬픈 역사를 자꾸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젖어있는 식민교육의 냄새를 인식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의 의학교육 역사를 사람으로 보면 순탄하고 좋은 삶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억압적인 교육시스템을 갖고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의학교육을 도입했겠나? 식민교육을 위해 심어놓은 제도다. 해방 이전과 이후에도 의대교육에 진입한 사람들 중 일부는 신분상승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의대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진정으로 의대에서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좇고 교육시스템도 좀더 자유롭게 운영해야 한다.

의학교육에 일상화된 구조적 폭력도 걷어내야 한다. 이 말이 한국 의학교육이 쌓은 업적을 모두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사실 우리 의학교육은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

근대의학 100년 만에 이만큼 이루는 것이  쉽진 않다. 내 말은 성과는 성과대로 인정하되, 고쳐야 할 것은 고쳐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전우택: 유감스럽게도 의예과 시절부터 본과 선배들의 폭력성 앞에 노출된다. 술을 엄청나게 먹여서 응급실로 실려 가게 한다. 보통 술을 잘 못 마시는 후배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면서 자신의 힘과 권위에 강제로 복종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군대는 제대와 함께 끝나지만 의대는 의예과부터 인턴·레지던트, 이후에도 의료계 선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절망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슬픈 문화다. 그러다보니 의국에서 튈 수도 없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음놓고 내놓지도 못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자신에게 상상력이 부재한지도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실용적인 상상력을 발달시켜 논문은 쓸 수 있겠지만 초월적인 상상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 의학계가 한해 발표하는 SCI급 논문이 몇편인 줄 알고 이런 소리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상력을 제한하는 문화로는 한정된 영역에서의 발전만을 담보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 10년 전부터 의료계가 소통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과대학에서도 인문학 강좌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도입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의대생이나 의사들에게 요구되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나?

안덕선: 학점화된 코스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는데 이제 겨우 시작단계다. 의학이 타학문과 적극적으로 교류해야 한다는 것에 본격적인 공감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문학을 가르칠만한 하부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이 있다는 점이 기대해볼 만한 부분이다. 채워야 하는 곳이 보인다면 그만큼 채우려는 움직임이 있지 않겠나?

전우택: 최근 의학전문대학원체제가 도입되며 입학과정에 변화를 줬다. 하지만 MEET 시험 준비생의 95%가 이공대 출신이다. 연세의대에서 문과생을 뽑으려 시도했는데 힘들었다. 의학의 본질적인 가치에 끌려 의전원에 진학하는 학생을 위해 전공이 더 다양해져야 한다.

선배 의사들이 성취한 것을 되풀이해 가르치는 교육에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제시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보다 분명한 목표의식과 자극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평가할때도 상상력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족보만 달달 외우는 학생에게서 창의력은 기대할 수 없다.

예술적인 상상력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이 해결이 안된 문제들에 도전하고 그 반응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

안덕선: 대만 정부는 최근 의학교육에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해 국가에서 돈을 대서 인문학 교수 2명씩을 채용하게 했다. 우리도 식민지 의학교육이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 생명공학이란 보다 큰 틀에서 발전을 모색할 때가 됐다.

사회: 오늘 주로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런데 과학도인 의사에게 상상력이 지나치게 과잉될 때 우려되는 문제도 있을 것 같다.

전우택: 흔히 상상력하면 해리포터나 공상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하지만 동시에 실용적인 상상력도 있다. 예를 들어 거대한 코끼리의 무게를 어떻게 잴까.

코끼리를 배에 태워 물이 얼마나 올라오는지를 보고 코끼리를 내린 다음 물이 차올랐던 만큼 돌을 싣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실용적인 상상력이다. 의학연구에서도 실용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용적 상상력 외에 초월적인 가치의 상상력이 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의 '람마넬'로 들어간 것은 "모든 인간은 다 공통의 가치가 있고 문명국이나 그렇지 못한 국가의 사람들의 고통이 일치한다"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도 못한 도덕적, 윤리적인 이슈의 정평이 일어난 거다.

의대생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도 3가지 관점에서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지나치면 문제될 수 있다. 잘못된 상상력이 과장돼 있는 사회에 우리 의학이 존재하기 때문에 건강하고 생명력을 가진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전문성과 정치성이 부딪칠 때 전문적인 얘기들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겪은 반 전문가주의의 전형적인 예이다.

하지만 상상력의 빈곤은 인슐린의 부족과 비슷하다. 인슐린이 부족하면 온몸에 다 문제가 생긴다. 상상력도 그렇다.

안덕선: 아직은 부족이 문제지 과잉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사회: 의사라는 직업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집단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의사들의 행복지수가 낮다는 느낌이다. 의사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인식과 가치평가능력을 고양시키는데 상상력이나 인문학적 소양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전우택: 모든 직업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직업이 의사다. 그만큼 의사들이 행복하지 않게 산다는 거다. 의사가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술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거다.

너무 많은 학습량과 숨돌릴 틈없는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균형있는 정서적 발달을 잘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발전밖에 이룰 수 없었다. 스트레스에 생각보다 취약하다.

더욱이 의료계가 매우 경쟁적인 사회다.  한 학기 끝날 때 마다 등수를 매겨서 통보하는 학과가 있나? 나중에 전문과를 지원할 때도 등수를 낸다. 의대생들이 개성을 갖고 의대생활을 한다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을 말해주는 것은 오직 경쟁그룹에서의 서열이다.

여기서 일종의 초월적 상상력의 부재가 생긴다. 내가 배운 의술을 갖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에 쓰겠다는 생각보다 얼마나 인기있는 과에 들어가고, 어느 대학병원에 남고, 개원을 해도 남보다 잘되냐 안되냐를 따진다. 끊임없이 비교와 경쟁의 대상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남들의 평가를 늘 의식한다.

인생이 행복해지려면 자신의 독창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를 누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안덕선: 좋은 지적이다. 17세기에 쓰여진 윤리학책을 보면 의사들이 절대 버리지 못하는 3가지 속성을 탐욕·자부심·시기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굉장히 피곤하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그런 속성들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전우택: 첼리스트 장한나의 인터뷰을 본 적이 있다. 기자가 장한나에게 "당신은 어린 나이인데도 어떻게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가"라고 물었다.  어떤 음악을 연주할 때 자신이 책에서 읽은 것들, 예를 들면 나이가 많은 노부부가 유럽의 어느 거리를 천천히 걷는 장면이라든지 아이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엄마의 마음 등을 비주얼하게 이미지화시킨다고 답했다.

의사의 삶이 단조로우면 진료하는 환자의 삶도 단조롭게 보게 된다. 의사들이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서도 상상력의 개발이 필요하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