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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서담(瑞潭) 구병삼 교수

[인터뷰]서담(瑞潭) 구병삼 교수

  • 조명덕 기자 mdcho@kma.org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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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말 고려의대에서 정년퇴임한 서담(瑞潭) 구병삼 교수(산부인과학)는 자애로운 성품, 지칠줄 모르는 추진력,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는 학문에 대한 열정 등을 두루 갖추고 산부인과학교실은 물론 고려대의료원발전의 터를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30여년은 학술적인 면은 물론 진단·치료에 사용되는 장비·기기 등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였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산부인과학 및 고려대의료원 발전에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흘러 정년을 맞기는 했지만 정년 전이나 정년 후에나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때문인지 덤덤합니다.”

`〈캠퍼스에 아쉬움만 남기고〉라는 이 난의 제목이 저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농을 던진 구 교수는 그만큼 교수로서, 의사로서의 생활이 아쉬움 보다는 보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한의사로 환자를 살펴온 선친과 큰 형의 영향으로 의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인턴과정에서 여러 진료과를 두루 경험하면서 산부인과 분야가, 내과·외과·소아과 및 내분비학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는 점에 이끌려 산부인과학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 구 교수는 스스로 택한 길을 늘 최선을 다하며 걸어왔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교과서에는 나와있는 `태아경'이 그때 우리나라 교육현장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교육, 교과서에만 의존하는 교육현실이 안타까워 1981년 영국 킹스칼리지 병원 산부인과에 자비로 연수를 가서 `태아경에 의한 태아수혈 술기'를 배우고 장비도 구입하고 돌아와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며 안타까움을 풀었습니다.”

구 교수는 이때 영국은 물론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릭스병원에서 불임증과 내분비분야에 대한 연수를 겸하며 본격적으로 냉동정자에 의한 불임증 치료를 연구하게 된다. 덴마크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구 교수는 곧 프랑스에서 자궁경부확대경 검진 술기를 연수한 데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헨리포드병원에서 전자태아감시장치에 의해 태아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술기를 배우고 예일대학병원에서도 관련 분야에 대한 연수를 받는 등 1981년을 배움의 해로 삼았고 영국 킹스칼리지에서의 산부인과 내분비학 연수는 82년으로 이어졌다.

“덴마크에서 냉동정자에 의한 불임치료를 연수하면서 필요한 장비를 역시 자비로 구입해 고국으로 공수하며 귀국후 이 치료법을 국내에서 실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83년 시도한 이 방법이 84년 성공적인 출산으로 이어져 의사로서 큰 행복을 느꼈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실험용 쥐를 연구실에서 직접 사육하며 연구를 거듭해 온 구 교수는 다른 병원에서 자궁외임신으로 인한 수술을 두번이나 받는 등 임신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환자와 그 가족이 성공적인 출산으로 기뻐하던 순간이 눈에 선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런 결실을 시기한 사람들에 의해 모함을 당하기도 하는 등 시련의 순간도 있었다.

의료원내에서 진료과장이나 주임교수 등 보직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원 교학부장을 거쳐 89년 혜화병원 원장에 임명돼 참신함을 바탕으로 성실·정직 및 객관적인 사고와 행동을 인정받은 구 교수는 혜화병원장 3년임기의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안암동으로의 이전이라는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도 했다.

“이전후 약 1년반은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 고려대 총장도 동의한 상태였으나 이전 직후 흑자로 전환시킨 경영능력이 돋보인 때문인지 93년 주위로 부터 의대 교수협의회의 직선에 의해 처음 선출되는 의무부총장 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유받았습니다.”

당시 열세를 감수하고 마지막 유세에 나선 구 교수는 고려대의료원 및 산하 의대·병원의 발전방안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정연하게 발표, 열세를 극복하고 1위로 부총장후보에 당선됐다.

“그러나 당시 교칙상 직선제 자체가 불법일 수 밖에 없었고, 본교 교무위원회에서도 이 점을 거론하며 부총장임명을 거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선거와는 관계없이 적임자를 임명해야 한다'는 총장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첫 직선제에 의한 부총장에 임명됐습니다.”

임명후 생명과학연구소·의과학연구소를 만들고 안산병원·구로병원을 증축하는 등 공약을 다 지켰다는 구 교수는 95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3대 부총장선거에도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4년간 고려대 의료원장 겸 의무부총장으로 의료원 발전의 터를 닦았다.

“자비로 해외연수를 다니고 의료장비를 구입하는 등 학교에서 받은 월급을 집에 가져다 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지금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감출 수 없습니다. 크리스챤인 만큼 `어려운 때 일수록 시련을 생각하고 좋을 땐 교만하지 말라'는 등 성경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한편 구 교수는 정년이 멀지않았던 99년 노화방지 의학에 새롭게 도전, 미국에서 노화방지의학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는 등 학문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바탕으로 대한노화방지의학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10월경 본격가동될 `한국노화방지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으로 활동할 구 교수는 이 연구소 부설클리닉을 통해 계속 환자곁에도 머무를 계획이다.

스스로의 생각에도 바쁜 여정을 걸어왔다는 구 교수는 부인 김양자 여사와의 사이에 3남을 두고 있다. 장남 승엽 씨는 서울의대 졸업후 서울대 보라매병원 산부인과 스탭으로 근무하고 있고 차남 두엽 씨는 고려의대 졸업후 울산의대 서울중앙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치는 등 부친의 뒤를 잇고 있으며, 삼남 상엽 씨는 서울법대 졸업후 현재 서울고검 법무관으로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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