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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100년의 발자취<4>

의협 100년의 발자취<4>

  • 김영숙 기자 kimys@kma.org
  • 승인 2008.08.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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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 딛고 세계중심 '우뚝' 민간외교 '톡톡'

한국의료 성장 이끈 국제 교류 어제와 오늘

오늘날 괄목할 만한 한국 의학 및 의료의 성장 이면에는 의료선진국과의 교류가 큰 몫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한의사협회 역시 100년의 역사를 쌓아오는 동안 의·정·학의 한 축으로서 한국 의학발전과 의료제도 및 조직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하는데 국제교류는 유무형의 자산이다. 더욱이 의협의 국제교류는 의협의 발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민간외교의 몫까지 톡톡히 맡았다.

1985년 10월 22일 제37차 세계의사회 브뤼셀 총회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있는 문태준회장.

국제암학회 참석 국제학회 첫 발

의협의 역사에서 우리나라 의료계 대표가 국제학회에 처음으로 공식 참석한 것은 1947년 미국 센트루이스에서 열린 국제암학회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의협 학술위원장인 윤일선 서울의대 교수와 고병간 대구의대 학장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월을 거슬러 일제 강점기에 국제교류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1939년 가을 이용설 전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한국대표 자격으로 태평양외과학회에 다녀온 것을 구실로 일제는 한국인 의사들이 조직한 '조선의사협회'(1930년 2월 21일 발족)의 해산을 요구했다. 한성의사회도 경성의사회에 통합됐다.

광복 후 남한에서는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과 자연스레 교류가 이뤄졌다. 6·25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6월 1~5일 뉴욕에서 열린 제102차 미국의학협회 연차대회 및 총회에 김성진·최성장이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의료계는 미국의 의학 및 의료제도, 의료인력 정책 등 많은 영향을 받게 됐다.

우여곡절 끝 일본의사회와 교류 재개

광복으로 일본과의 교류는 한동안 중단됐으며, 다시 교류의 물꼬를 트는데 난항을 겪었다. 1961년 11월경 의협은 일본의사회로부터 한·일 의료문화 교류를 전제로 초청받아 10명의 방일 의사사절단을 구성해 명단을 통보했으나 일본의사회가 국제어인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어로 공한(공문)을 보낸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의협이 한글로 공한을 보내 대항하자 양 쪽의 감정은 극에 달했고 이로써 첫 번째 교류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예비회담이 주기적으로 열렸으나 국교 수립 전망이 어두웠고, 민간단체의 교류도 사실상 어려웠다. 그러다 1964년 3월 5일 한일 협상 일정을 확정하면서 국교 정상화의 길이 열렸다. 그해 5월 박건춘 의협 이사장과 손영수·민광식 이사 등이 일본의사회를 처음 방문했으며, 그해 10월 8일 다케미 타로 일본의사회장이 의협 종합학술대회에 참석하면서 한일 의학계 교류가 정상화됐다. 이렇게 복원된 일본의사회와의 관계는 현재까지 상호 도움을 주면서 돈독하게 유지되고 있다.  

1971년 CMAAO(시마오) 총회 개최...본격 국제 행보

의협의 세계적 교류 행보는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7월 당시 윤일선 의협 회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암학회에 참석하는 길에 미국에 들러 세계의사회(WMA)의 정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비로소 대한의사협회의 이름을 국제의사회에 알리게 됐다.

이렇듯 국제의학기구의 가입은 비교적 빨리 진행했으나 6·25 한국전쟁과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교류는 원활하지 못했다. WMA만해도  당시 회비를 제때 납입하지 못해 한동안 교류가 끊겼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교류를 재개했다.

아시아 대양주 의학협회연맹(CMAAO, 1950년 4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창립)에는 1961년 11월 8일 가입했다.  

국제의학계에 대한의사협회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은 1971년 제7차 CMAAO 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의협은 2년마다 열리는 CMAAO 총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1967년 3월 29일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5차 총회 때부터 유치를 거론하게 되고, 명주완 회장때인  1969년 11월 10일 중화민국(대만) 대북에서 열린 제6차 총회 때 제7차 총회를 마침내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1970년 1월 20일 의협 임원진을 중심으로 시마오 총회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정부당국에 국고보조금 지원을 요청해 그해 6월 시마오총회 집행위원회를 발족했다.

1971년 10월 13~15일 조선호텔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7차 CMAAO 총회 및 학술대회에는 15개국 대표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학술대회에는  장기이식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콜로라도의대 토마스 스타즐 교수,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동맥경화증 연구의 권위자인 서독 뮌헨대학의 페도르 리넨 교수, 재미교포의학자로 세계적인 약리학자인 뉴욕주립의대 김광수 교수, 다케미 타로 일본의사회장, 오기복 중화의협회장, 조스 G 타마요 필리핀의사협회장 등 당대 거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제7차 시마오총회 개최와 1970년대 경제 성장에 힘입어 이후 한국의 국제대회 유치는 활기를 띠게 된다. 의협 산하 분과학회에서 국제학회인 국제흉부질환회의(1975년 10월)를 유치하고, 여세를 몰아 1970년대 말까지 9개 국제학술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명주완·문태준·김재정 회장 등 시마오 회장 3번 배출

1971년 시마오총회를 처음 유치한데 이어 10년만인 1981년 '한국의학제전'인 제23차 의협 종합학술대회(9월 14~19일)와 제12차 시마오총회는 국제교류 뿐 아니라 한국 학술대회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1981년 9월 14일 열린 제12차 CMAAO 총회 및 학술대회 개막식에는 280여명의 각국 대표을 비롯해 1500명이 참석했다. 이 기간 동안 함께 열린 100주년 사진전·의학전시(포스터 130여점)·MEXPO(의료기기전시회)·의인미전엔 연인원 1만4000여명 참석했다. 당시 지역의사회와 전국 의과대학에서 전세버스를 대절해 참가했다는 본지 보도를 살펴보면 국제적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의료계가 일치단결한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또 당시 천명기 보건사회부 장관은 14일 하루에만 3번(개막식·멕스포개막식·만찬) 참석, 당시  의·정 관계가 돈독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제12차 CMAAO 총회의 주제는 1977년 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의료비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아진 것을 반영, '아시아대양주국가에서 상승하는 의료비를 과연 억제할 수 있나?'(호주 헤롤드 린드지이 톰슨)가 채택됐다. 의료비 상승 억제를 위해 의사들의 역할 증대 및 이를 위해 노력할 것 등 21개의 결의도 채택됐다.

1969~1971년 명주완 회장이 제9대 CMAAO 회장으로 활동한 이래 1981년 총회에서는 문태준 당시 의협 회장이 제15대 CMAAO 회장에 취임하는 경사가 겹쳤다. 이어 2005년에는 김재정 회장이 제27대 CMAAO 회장에 당선, 한국은 3명의 시마오 회장을 배출한 국가가 됐다.

아시아 변방서 WMA 리딩그룹 부상

1949년 가입한 WMA에서 한국의 존재를 비로소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81년를 기점으로 한다. 1981년 CMAAO 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당시 문태준 회장은 "형식적인 참여가 아닌 발언권을 가진 영향력 있는 참여"를 내세워 1981년 제34차 세계의사회 총회(리스본 9월 27일~10월 2일)에 47명의 한국대표단을 파견했다. 한국대표단은 미국·서독·일본 다음으로 많은 규모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대한의사협회의 존재를 알린 계기가 됐다. 문태준 회장은 여세를 몰아 1984년 10월 31일 제36차 WMA 총회(싱가포르)에서 차기회장 출사표를 던졌다. 이전까지 차기총회 유치국의 의사회장이 차기회장에 피선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1983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제35차 WMA 총회에서 정관을 개정, 자유경선제도로 변경하면서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당시 선거에는 뉴질랜드의사회의 윌리엄 회장이 출마할 예정이었으나 한국보다 열세임을 간파, 출마를 포기하면서 문태준 회장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1985년 10월 22일 제37차 총회(벨기에 브뤼셀)에서 49개 180여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문 회장은 세계의사회장에 취임했다.

세계의사회장 당선은 국제의사회에서 변방에 머물렀던 의협을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현재  WMA 이사국, 워킹그룹 활동으로 이어져 일본·호주와 더불어 아시아국가 가운데 WMA의 리더국가로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더욱이 창립 100주년을 맞아 2008년 10월 15~18일 전세계 86개국 4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WMA 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키로 해 또 한번 비상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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