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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8 12:22 (일)
어떤 의사 이야기

어떤 의사 이야기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8.2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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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섭(충남 서산·신내과의원)

내과 레지던트 1년차를 시작할 때의 얘기다.

같이 근무할 레지던트가 다른 곳에서 인턴을 마치고 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근무 당일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4살이나 많았으며, 군대도 제대했고 결혼한 상태. 함께 일할 파트너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필자는 당시 미혼에 군대도 안갔다온 상태였고 대학 졸업 1년차의 신참이었으니…. 게다가 나이 차이가 많고 가정까지 있으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궂은 일은 내가 맡아야 할 상황이었다.

첫 인상이 조금 무지막지하고 학구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고 능글한 인상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술 마시고 늦을 때면 필자가 그의 일까지 맡아서 하고 당직서다 슬며시 집에 가면 대신 당직을 서는 등등의 일이 되풀이됐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필자에게 상당히 고마워하고 잘 대해주었다.

그러다가 같이 술도 마시고 집에도 놀러가고 하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부인이 상당히 미인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여자를 만났는가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게됐다. 그가 군대 제대를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가 당시 대학 4년생인 지금의 부인을 우연히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후 어찌어찌 하여 여자의 마음은 얻었는데 양쪽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다. 남자 집에서 보면 당시 의사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는데 별 볼일 없는 집안의 여자를 며느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 집안에서는 당신들의 귀한 딸을 일단 반대하는 집안에 줄 수 없다는 것과 그의 인상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 반대의 이유가 됐다.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은 했는데 양가의 축복은 고사하고 부모나 일가 친지가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친구들만 참석한 채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살림은 군대 제대 때 나오는 돈(월급에서 강제적으로 하는 적금)으로 단칸방을 마련해 시작했는데 그 때까지도 본가의 인정을 못받아 부모님께는 함께 가지 못한다고 했다.

무대뽀같은 그에게 그런 순애보가 숨겨져 있었다니…. 그 때는 정말 의사면허만 가지고 있으면 외모와 재산을 겸비한 여자를 쉽게 맞을 수 있는 시대였는데 말이다.

레지던트과정이 끝나고 필자는 군대에 가고 그는 지방의 종합병원에 취직해서 근무를 시작했다. 돈을 꽤 벌었다고 했다. 필자가 가끔 놀러 가면 푸짐하게 대접받았던 기억이 난다. 필자가 제대 후 취직을 한지 얼마 안 되어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가 악성임파종에 걸렸다는 것이다. 악성임파종이면 암아닌가. 백혈병에 버금가는 악명을 가진….

서울대병원에 입원치료 후 6개월 만에 완치되었다고 자랑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필자는 힘들다고 보았다. 일단 호전은 되지만 재발하는 것이 통례, 그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쨌던 그는 부평에다 개원했다. 그렇지만 아니나 다를까 1년 만에 재발되어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별세하기 몇 달 전 그를 만났을 때 필자에게 그의 병원을 인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이승을 등진 후 그의 아내를 만나 병원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결국 여의치 못해 병원 인수는 이뤄지지 못했고 그의 부인과도 연락이 끊어졌다.

조금은 죄스런 마음이었다. 마지막 부탁이었는데 들어주지 못해서…. 병원이 처분 안되면 시설비와 장비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도 보기 드물게 순수한 사람이었는데 힘들게 살다가 조금 형편이 나아지자마자 큰 병에 걸려 부인과 두 아이들만 두고 갔으니 인생 참 불공평하다 싶은 마음이었다.

필자는 그 이후 20년 가까이 더 살면서 의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행복하다 할까?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그를 만나 옛날처럼 떠들면서 취하도록 한번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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