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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100년의 발자취<2>

의협 100년의 발자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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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8.1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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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건강 향상·의권 수호 본산…
회원결집 구심점

관철동에서 이촌동까지…굴곡 많은 회관사

대한의사협회의 전신인 조선의사협회는 1947년 5월 10일 창립총회를 열 당시 임시 사무소를 보건후생부 차관실에 뒀다. 광복과 6·25라는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 속에 의협은 자체 회관이 없이 서울대병원·보사부 차관실·보건부 의정국 등을 전전해야 했다.

대한의사협회가 국내 최대 전문가단체로서의 대내외적인 위상을 확고히 하게 된 것 계기는 1955년 11월 12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8번지 옛 의친왕궁을 매입, 자체 회관을 확보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수복 2년 만에 의협이 자체 회관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후 혼란 속에서도 의협 회원들의 단결력과 집행부 임원들의 리더십을 꼽을 수 있다. 회관 구입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회원들은 기꺼이 거액의 성금을 내놨다. 당시 회원 개인이 낸 성금 규모를 현재 수준으로 환산하면 최소 100∼200만원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열린 정기총회에서 회관 구입시 부족한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의사면허증을 교부할 때 신입회원들에게 의협 입회금으로 1만환씩 징수하기로 결의했다는 기록을 미뤄볼 때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당시 대기업인 금성사의 신입사원 한 달 월급은 6000환이다). 약 218배 가량 물가가 상승한 것을 감안하면 회원 1인당 약 200만원 이상의 성금을 납부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자란 회관 매입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100∼200만원 가량의 성금을 납부했다는 사실은 당시 의협 지도부의 단단한 리더십과 회원들의 단결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1955년 11월 12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82번지 옛 의친왕궁을 매입해  자체회관을 마련했다. 1960년 11월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5년동안 이용된 의사회관은 당시 서울시의사회와 함께 사용했다.

회관 매입 위해 200만원씩 입회비 납부

회원들이 거액의 성금으로 마련한 관훈동 의협 회관은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 중단된 <대한의사협회지>를 복간하고, 회장의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바꾸는 회칙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등 도약을 위한 터전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60년 11월 7일 회원들이 피땀 흘려 마련한 관훈동 회관이 예기치 못한 화재로 소실되면서 각종 서류는 물론 비품과 집기가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는 불상사를 맞았다. 협회지 발간도 2개월 동안 중단되는 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새 회장단은 취임 한 달 만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소용돌이에 휩싸여야 했다.

어렵사리 마련한 첫 자체 회관이 소실되면서 되면서 졸지에 길거리에 나 앉아야 했던 의협은 한동안 종로구 관철동에 있던 약사회관 건물로 사무실을 옮겨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 약사회관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할 정도로 관훈동 회관 화재는 너무나 큰 손실과 후유증을 불러왔다.

현재의 서울 이촌동 의협회관 골조공사가 마무리단계에 있다(1970년 12월). 그 후 자금난으로 인해 일시 중단된 외곽마감 공사는 1971년초 다시 착수돼 9월 말까지 마무리한 후 10월 30일 2층까지의 내부공사만을 마친채 서울 남대문 우남빌딩에 전세로 입주해 있던 임시사무실을 새 회관으로 이전하게 된다.

화재로 회관소실…약사회관서 더부살이

약사회관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의협은 이사회 결의를 거쳐 1961년 1월 14일 관훈동 대지를 매각하고 3월 11일 중구 쌍림동 151-10번지에 새 회관을 매입해 입주했으나 부채 문제가 얽히면서 한동안 적지않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어렵사리 매입한 쌍림동 회관은 부채 문제에 발목을 잡히면서 입주한지 불과 1년만인 1962년 5월 11일 3060만원에 매각하고 그해 6월 서울역 앞에 있던 구 세브란스병원(중구 남대문로 5가 115)에 임시 사무소를 얻어야 하는 곡절을 겪어야 했다.

5·16 군사혁명 후 재건총회에서 당선된 의협 임원진은 1963년 초 종로구 관철동 44-5번지에 대지를 매입, 세 번째 회관 건립에 착수했다. 4월 23일 첫 삽을 뜬 관철동 회관은 주한미군사원조계획처(AFAK)로부터 3000달러에 상당하는 철근·목재 등의 자재를 기증받고, 의사 회원들의 성금 300만원을 보태 4개월 만인 9월 14일 준공식과 함께 입주를 시작할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56평의 대지 위에 건평 145평을 갖춘 관철동 회관은 1965∼1967년에 일어난 2대 악법(유사의료업자에 관한 법률안·보건소법 개정안) 파동과 가두시위는 물론 기관지 <醫協新報> 창간(1967년), 제 7차 아시아·대양주의학협회연맹총회(시마오총회) 유치, 대한의정회 창립(1970년) 등의 기록을 남기며 8년 동안 의협 회원들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했다.

관철동 회관 착공 4개월 만에 준공

<醫協新報> 창간을 비롯해 회무가 점차 늘어나면서 관철동 회관은 점차 협소한 공간문제가 제기됐다.

1969년 4월 제주에서 열린 제 21차 정기총회에서는 관철동 회관을 매각하고 새로운 매머드 회관을 신축할 것을 집행부에 위임했다. 4월 10일 구성된 회관건립전권위원회는 1969년 10월 16일 2820만원에 관철동 회관을 매도하는 한편, 11월 6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로부터 용산구 동부 이촌동 302-75번지 541평을 1900여만원에 매입했다. 그해 12월 5일 열린 임시대의원총회에서는 모자라는 건축비용은 전국의 회원들로부터 모금키로 결의한데 이어 1970년 4월 8일 기공식을 열 수 있었다. 1971년 10월 30일 2층까지 내부공사를 마친 상태에서 첫 사무실 이전이 이뤄졌다. 새 회관 입주 이후에도 공사비가 모자라 내장공사는 더디게 진행됐다. 동아제약주식회사가 1000만원을 희사해 동아홀을 올릴 수 있었고, 고 한격부 회장이 500만원을 쾌척해 사석홀을 세울 수 있었다. 권영범 전 재일본한인의사회장이 100만원의 특별희사금을 내놓은 것을 비롯해 회원들의 정성어린 성금이 답지하면서 한 층 한 층 4년 동안 쌓아올린 것이 현재의 이촌동 회관이다. 1974년 4월 26일 이촌동 회관 준공식이 열리기까지 고 명주완·한격부·조동수 회장을 비롯한 3대에 걸친 집행부 임원들의 노고도 빠뜨릴 수 없다.

건립 이후 30년이 넘도록 한강을 굽어보며 서 있는 이촌동 회관은 국민건강 향상과 의권 수호의 총본산으로 의협 발전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3대에 걸친 집행부의 노고와 회원 정성으로 이촌동 시대 열어

최근 10여년 사이에 의료계 안팎에 변화와 개혁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의협의 대내외적인 정체성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의협 회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난 1995년 2∼10월까지 약 9개월 간 활동한 '대한의사협회 발전위원회'(이하 발전위)는 의협 회관 건립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1996년 7월 (가칭)의료단체 종합회관 건립추진위원회로 구성되고, 타당성 조사를 위한 연구용역이 발주됐다. 1997년 6월 제출된 '대한의사협회 이전 및 건립계획 확립과 타당성 조사 용역 보고서'(㈜메디콘설트)는 새로운 회관 건립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의약분업 투쟁을 비롯한 의료계의 변화에 맞물리면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중단됐다. 한 동안 보류하던 의협 회관 건립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이어진 '의협개혁추진위원회'(의개추)를 통해서다. 의약분업 투쟁의 후유증을 추스르고 장기적인 의료개혁을 담보해 내기 위해 강력하고 민주적인 의협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사 사회의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의개추의 활동은 탄력을 받았다. 의개추는 이러한 회원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2001년 4월 의협 개혁방안 보고서를 제출했다. 의개추는 신축회관에 기존 의협의 기능을 소화할 공간 마련, 관련단체 및 조직의 사무실, 정보 수집 및 제공 공간, 컨벤션센터, 전시장 및 박물관, 건강증진시설, 편의시설 등과 함께 건축위원회 상설화 방안을 제시했다.

의협 건물 신축안은 2002년 12월 의협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준비위원회에 의해 주요 기념사업으로 채택된데 이어 2003년 9월 의협 상임이사회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탄력을 받기도 했으나 회원들의 무관심과 내부 문제에 발목을 잡히면서 추진력을 잃은 채 다시 수면 아래로 잦아들고 말았다.

회관 신축 검토만 하다 다시 수면아래로

회관이란 단순한 시설물이 아니라 다양한 사업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회관은 회원의 구심점이자  단체를 대표하는 상징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4년 동안 이촌동 시대를 지켜온 낡은 의협 회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털어내고, 100년 의협의 미래 비전을 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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