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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6 14:01 (금)
'베풀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죠'

'베풀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죠'

  • 유인왕 기자 kmatimes@kma.org
  • 승인 2001.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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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섭 박사, "여생동안 할일 바로 이 것…"

속초방송국 오른쪽 담을 끼고 언덕을 올라가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을 약 30미터 들어가니 자그마한 고택(古宅)에서 이기섭(李基燮)박사 부부가 맞는다. 비록 백발에 단구이지만 60대의 정정한 모습에, 미수(米壽)를 넘긴 분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아직도 매주 산간벽지인 양양군 서면 보건지소로 무료진료를 나가는 이 박사의 건강을 짐작할만 하다.

올해로 19년째가 되는 무료진료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속초도립병원 외과에 근무하면서 국민학교 신체검사를 나갔을 때 그곳 동네 이장이 백내장환자를 부탁해서 만나보았는데 전문의의 진찰이 필요해서 원주의 병원으로 보냈으나 이미 너무 늦어 결국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대단했지요. 그후 도립병원을 퇴임하고 미국여행을 갔었는데 한 백화점에서 노인들에게 무료검진을 해 주는데 거동이 불편한 사람등 노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내가 남은 여생동안 할 일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결심하고 바로 무료진료를 시작했지요”라고 입을 연다.

보건소·도립병원서 직장 매듭

정년퇴직했다고, 건강하다고 누구나 다 이런 봉사생활을 하게 되지는 않는 법. 이박사는 애초부터 남을 위하는 정신을 가지고 자랐고, 이런 정신에서 의사를 지망했던것 같다.

황해도 해주고보 4학년때 식민지교육과 문제교사 반대 단식동맹휴학을 벌여 일본경찰에 잡혀간 후 퇴학까지 당했던 열혈 청년은 주위의 권유로 처음에는 공과계통 진학을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모친이 의사진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던 의료현실을 개선해 보겠다고 세브란스 의전을 지원했던 것.

이화의대 교수 겸 부속병원장을 하다가 서울이 아닌 시골의 개원을 택했던 것도 그리고 개원생활도 진료를 통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세속적인 개원생활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으며 그후 보건소와 도립병원 근무를 마지막 직장으로 택했던 것도 모두 李박사의 일관된 이타(利他)정신에서 연유했음을 알 수 있겠다. 또한 세브란스 의전때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현재 감리교 명예권사인 이 박사의 독실한 기독교정신도 큰 영향을 준것 같다.

농어촌 보건의료운동 확산 기대

"보건진료소에는 간호사 한명이 지소장으로 있는데 처방전을 발행할 수도 없어 투약의 한계도 있지만 충분한 약품지원도 되지 않아 실제적인 도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홍콩에 있는 딸이 약도 많이 공급해 주고 안경도 많이 지원해주어 무료진료 주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박사가 농어촌 벽지의 무료진료 지원을 위해 만든 모임이 바로 `영북농어촌보건의료사업 협의회'. 이 협의회는 이박사의 자녀, 친척, 지인등 15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회비로는 부족하여 약품, 비품, 운영비 등 모두 여의치 못하단다. 이제까지 1백80여명의 노인들에게 무료로 안경을 제공하고 약품투약 등 많은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계속 부족하단다. 이 박사의 사재지원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농어촌 보건의료운동이 `새마을 운동'처럼 번져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었으나 못내 아쉬운 눈치다.
설악산 기슭의 양양군 서면, 서림리, 황이리, 갈천리, 영덕리 등 1백80여 가구 6백여 주민들에게 백발의 이기섭 박사는 의사이면서 모든 문제까지 상담해 주는 상담역 어른이고, 사탕과 소주를 즐기는 노인에게는 소주까지 챙겨주는 끈끈한 정으로 맺어져 있는 사이다.

지역의 모든 언론들이 보도한 것을 보면 이 박사에 대한 명칭이 아주 다양하다.
`은발의 의사할아버지' `속초의 명사' `설악파수꾼' `산이 좋아 서울을 버리고 산으로 이사한 광산왕(狂山王)' 등등. 거실에는 산악인으로 받은 상패와 감사패 등이 즐비하다.

'설악산 파수꾼' 활약 대단

속초로 이사하기 전 서울산악회장과 한국산악회 이사등으로 백운산장을 건립하는 등 이미 서울에서 산악인으로서의 활약이 대단했으며 속초로 이주한 이후 설악산 파수꾼으로서의 활약과 업적은 실로 대단했다. 설악산의 모든 조난자를 구출하는데는 물론 설악산등산로 58㎞를 개척했는가 하면 설악제를 창설하는 등등 설악산악회장으로, 설악관광협회장으로, 설악제위원장 등으로 지역사회에 끼친 공은 대단하다. 이러한 공으로 74년에는 조선일보 청룡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파옆에 `클리니션(clinician)'이란 일본 의학잡지가 눈에 띈다. 아직도 의학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의료봉사를 하자면 공부도 계속해야 하지 않느냐?”며 오히려 반문한다.

김 구선생 시신 검안하기도

적십자 병원시절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선생의 시신을 검안했던 원로의사 이기섭 박사는 “산은 악착스런 인간을 순화시켜 너그럽게 만든다”며 산 예찬론을 편 다음 아무런 연고도 없던 속초로의 이주에 대해 한마디 언급한다.

“물론 산을 좋아해서 설악산으로 왔지만 4.19와 5.16등 혼란기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환멸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라고.

자연 젊은 후배들 문제로 옮겨간다. “요즘 젊은 후배들은 너무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것 같아요. 의술은 역시 인술이고 남에게 베푸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결코 거미줄은 치게되지 않습니다. 의약분업 문제는 정부가 너무 서두르는 등 잘못한 점도 있지만 환자를 볼모로 한 의사들의 극한 행동도 잘못된 것이죠.”

`원로의사'에 대한 예상과는 아주 빗나가게 자그마한 고옥에서 이화여전 출신 부인과 단둘이 검소하게 지내고 있는 이 박사는 `돈없는 사람은 돈 없어 공짜, 아는 사람은 안다고 공짜…' 등 개원생활을 했다고는 하지만 부의 축적과는 거리가 멀었던것 같다. “공부만 시켜주고 물려주는 돈이 없으니까 오히려 싸우지 않고 형제들간 의가 좋다”며 유쾌하게 웃는다. 행복하게 가치있는 노년을 살고 있는 원로 이 박사 부부가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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