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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 인터뷰] 고려의대 노영무 교수

[정년퇴임 인터뷰] 고려의대 노영무 교수

  • 이현식 기자 hslee03@kma.org
  • 승인 2006.02.2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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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학분야 최고봉 올라 뛰어난 후학 배출
부천세종병원 세종의학연구소 소장으로 재도약

▲ 노영무 교수

대한순환기학회 이사장 및 회장, 대한의학회 부회장, 대한의사협회 부협회장, 고려대의료원 기획조정실장, 고려대 안암병원 심혈관센터 소장…. 2월말로 정년퇴임하는 노영무 고려의대 교수가 쌓아온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지난 18일 서울 밀레니엄힐튼호텔에 제자들이 마련한 그의 정년퇴임 기념식장에는 발디딜틈 없이 많은 의료계 인사들이 참석했고, 축하 화환들이 끝없이 줄지어 늘어섰다.

서순규 교수와 미국 NIH 연구생활

노영무 교수는 스승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고 서순규 교수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서순규 교수는 당시 내과학계의 세계적 석학이었던 미국 앨러바마 대학의 해리슨 교수와 존스 홉킨스 대학의 맥쿠식 교수 문하에서 내과학과 심장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선진의학을 전파했다. 노영무 교수는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 반해 심장학을 전공하게 됐다. 노 교수가 환자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따뜻하게 배려하는 것도 서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서순규 교수는 학문적인 것 이외에도 제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제가 미국 NIH의 심장학 분야 연구교수로 있을 때 연장근무가 가능하도록 각서까지 쓰며 노력해주신 일은 결코 잊을 수 없죠."

노 교수가 연구자로서 진정한 안목을 갖추게 된 계기는 1980~1983년 미 NIH에서 연구생활을 한 것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제 모든 학문적 토대가 마련된 것은 NIH에서의 3년간의 연구활동과 임상활동, 각종 컨퍼런스, 그리고 미 심장학회 학술대회 참여하면서 얻은 지식과 기술, 세계적인 학자들과 격의 없이 교류할 수 있게 된 탄탄한 인맥 덕분입니다."

노 교수는 스승복이 많았다. 미국 NIH의 스테판 엡스타인 박사와 랜돌프 패터슨 박사는 그가 NIH에 좀 더 체류할 수 있도록 고려대 총장과 내과 과장에게 편지를 써주었다. "이 두 스승님들은 제게 좀 더 넓은 경험을 주기 위해 자신에게 의뢰된 논문을 리뷰시켰습니다. 또 자신이 주관하는 전국적인 학술 모임에 참석권과 식권을 주었고, 야간대학원에 보내주면서 학문적 식견을 넓히도록 했지요. 매년 춘·추 학회 참가비를 대주고 생일을 기억해 조촐하게 축하를 해주었으며, 다른 과 세미나에 가서 발표하는 것까지도 직접 방으로 불러 연습시켰죠."

"제자 생각 끔찍히 하는 선생님"

그래서일까. 노 교수는 제자들을 키워주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동주·심완주·서홍석·김영훈 교수 등 걸출한 후학들은 노영무 교수의 희생 위에 꽃을 피웠다.

노영무 교수가 배출한 박사 제1호인 오동주 고려대 구로병원장은 "미국 유학 시절 노영무 선생님이 미 NIH에 같이 계시던 친구분을 소개해 주셔서 아틀란타의 에모리대학으로 가게 됐어요. 그때로선 드물었던 유급 펠로우 자리도 얻고 심도자실에서 직접 스크럽까지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잠깐 미국에 오셨다가 저희 집에 들리셨는데 출국하실 때 공항에서 제 손에 살짝 200달러를 쥐어주시더군요. 당시 젖먹이까지 네가족이 생활하기에 벅찼던 시절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에 눈물이 흘러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를 운전하기 힘들었죠." 오동주 원장의 결혼식 때 축송을 해준 테너도 노 교수가 주선해준 것이었다.

노 교수는 가르치는 방법을 잘 아는 선생님이었다. "NIH에서 근무하면서 야간에 대학원 과정을 밟았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많지 않은데 배울 점은 많더군요. 저는 지금도 많이 잡다하게 나열해서 가르치기 보다는 확실하게 핵심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은 교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핵심용어, 즉 terminology만 정확히 전달해도 그 가르침은 성공적이죠.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은 학생들의 몫입니다. 기본적인 핵심을 제대로 가르치는 방법을 알고 그 다음에 확실하게 방향을 제시하는 능력을 교수들이 보여야 합니다."

그가 교육자로서 성공했다는 사실은 1987년 졸업생 사은회 때 받은 '우리들이 뽑은 좋은 선생님'이란 기념패를 봐도 알 수 있다. 노 교수는 이 기념패를 집에 방문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진열해놓을 만큼 소중하게 여긴다.

15년 전 고려대 혜화병원 시절 안암동으로 이사할 당시 그는 의료원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집 대신 병원에서 간이 침대를 놓고 먹고자고 했다. "구청·보건소·소방서 등 부르는 곳이 왜 그렇게 많던지…. 수시로 다니면서 건물 검사 등 각종 요구조건을 맞춰나갔죠."

국제심포지엄 열려고 적금 들기도

그 와중에 노 교수는 역사적인 '심근허혈 심포지엄'을 처음으로 열었다. "1991년 안암병원 이전에 맞춰 NIH의 세계적인 석학인 마슨·패터슨·캐논·볼리 박사 등 네 분을 초청했죠. 당시 이 정도의 국제적인 명사를 부르는 것 자체가 국내 의료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지금처럼 스폰서가 많지 않았던 당시 노 교수가 이 심포지엄을 개최하기 위해 적금을 들었던 일은 아내조차 모르는 비밀. 당시 500만원의 사재를 털어 시작한 심장허혈 심포지엄은 올해 10회째로 뿌리를 내렸다.

학문적인 욕심이 많았던 노영무 교수는 반면 명예욕은 없는 편이었다. 한번은 대한순환기학회에서 이사장 선출을 위한 임원추천회의를 하는데, 아직 노 교수가 맡을 차례가 아닌데도 그를 지명할 움직임이 일었다. 서로 이사장을 하려던 분위기였지만 노 교수는 양보했고, 이는 주위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결국 다음번 이사장에 선임됐다.

현재 대한의사협회 학술담당 부협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의협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술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봉직의나 전공의 등 많은 회원들이 의협에 회비를 내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지분으로 생각해서라도 의협이 학술적인 분야를 결코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점을 당부하고 싶네요." 일각에선 노 교수가 김재정 의협회장과 같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의협 부협회장이 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는 의학회 부회장으로서 추천을 받아 의협 부회장에 파견돼 의협 대의원총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노영무 교수는 2월 말까지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근무한 뒤 심장병 전문병원인 부천 세종병원 세종의학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노영무 교수의 지나온 삶

1968. 2 고려의대 졸업

1977. 9 고려의대 의학박사

1980. 9~ 1983.8 미 NIH 국립 심장·폐·혈액연구소 연구교수

1988. 5~ 1992.4 고려대의료원 기획조정실장

1998. 3~ 2003.2 김대중 대통령 심장내과 자문의

1998. 10~ 2000.11 대한순환기학회 이사장

2000. 5~ 2000.9 대한의사협회 학술이사

2002. 10~ 2003.10 대한순환기학회 회장

2003. 4~ 현재   대한의학회 부회장

2003. 5~ 현재   대한의사협회 부협회장

2004. 4~ 현재 고려대 안암병원 심혈관센터 소장

2004. 4~ 현재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창립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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