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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8 19:59 (일)
보령의료봉사상수상자

보령의료봉사상수상자

  • 편만섭 기자 pyunms@kma.org
  • 승인 2004.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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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유일성 원장
보령의료문화상 첫 수상자인 유일성(2000년 작고)원장. 평생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희생과 봉사로 일관된 삶을 살아 온 사회의 등불이었다.

실향민이지만 경북 고령에 터를 잡고 이웃 달성군·합천군·거창군에까지 인술의 베풀어 왔다. 생전 매월 3일은 무료진료일로 잡아 많은 환자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고, 노인을 대상으로한 진료봉사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뇌성마비와 소아마비 등 심신장애를 갖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정기적으로 재정지원을 해 주고 재활의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유 원장은 의사로서 뿐만이 아니라 향토사가로서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는데, 특히'대가야문화권개발추진위원회'위원장으로서 고령군안에 산재한 가야문화를 발굴해서 문화적 가치를 확인시켜준 것은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2회 홍사용 소장
충남 공주 정암면 보건소장으로 재직한 홍사용(충남정안보건지소·1987년 작고)소장. 보건소장으로 있으면서 주민들의 보건·의료 사업 뿐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홍 소장은 정기적으로 관내 초등학교를 순회하면서 보건교육과 무료진료활동을 벌여 주민들의 보건의식을 끌어 올리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아픈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때때로 소록도 나환자촌과 공주 정신병환자 수용소 등에도 옷가지와 양말과 같은 생필품을 보내는 정성을 보여 왔다.
이러한 홍 소장의 사람됨에 감복해 '정암면의 슈바이처'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보건소 2층에 자비로 독서실을 꾸며 놓고 학생들이 언제든 찾아와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도 하는 등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봉사와 베품의 삶을 이어왔다.

◇제3회 권경철 원장
강원도 화천에서 30여년 인술을 펼쳐 온 권경철 원장은 특히 의료혜택을 받기가 매우 어려운 의료취약지역 주민들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인물이다.

지난 50년대말 군병원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하고 전역할 무렵 지역주민과 군단국이 화천을 떠나지 말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주저 앉고 말았다. 구병원 근무시절에 수술환자가 생기면 군인뿐 아니라 지역주민들까지도 모두 권 원장이 전담해 왔기 때문에 권 원장이 그곳을 떠나면 큰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

권 원장은 주민들의 호소를 물리칠 수 없어 꼭 1년만 머물겠다는 생각으로 판자집 같은 방 한칸에 진료실을 차리고 환자를 보기 시작한게 어느덧 30년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권원장은 화천에서 남다른 사명감으로 수많은 응급환자의 생명을 구해냈다.

과로로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도 인술을 베푸는데는 전혀 소홀함이 없었다. 몇년전 위암 수술을 받고 현재는 서울 어느 외과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환자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제4회 조영호 원장
충북 황간에서 지역 지킴이 역할을 자임해 온 조영호(영창의원) 원장.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하나로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환자 진료와 지역사회 발전에 몸바쳐 왔다. 도립 대구의원 외과에서 근무하던 조 원장이 황간으로 돌아 온 것은 지난 1942년. 그후 조 원장은 환자진료와 고향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영동군 제2보건진료소장직을 비롯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평통자문회의 위원·황간 중고등학교 육성회장·황간노인회장·황간개발위원장 등 직책을 맡으면서 지역사회 발전과 육영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다. 자신의 영화는 과감하게 뒤로 한채 의사라면 지위 고하나 경제력의 유무를 가리지 말고 치료를 해 주어야 한다는 몸소 실천에 옮겨온 조 원장이야 말로 봉사하는 삶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제5회 김진경 원장
충남의 옛 도읍인 부여에서 40년 넘게 부여의원을 개원해 온 김진경 원장(1996년 작고). 오랜 세월 한눈 팔지 않고 봉사로 일관한 외곬 인생을 영위한 김 원장은 상대적으로 지역발전이 뒤진 한촌에서 의사를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인술을 베풀어 왔다.

욕심부리지 않고 조용하게 인술을 펴 온 탓에 눈에 띨만한 뚜렷한 행적이 부각돼 있지는 않지만 그 자체가 김 원장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난 40년대 부여에 뿌리를 내린 이후 오랜동안 살아오면서 밤낮없이 시골길을 오가며 환자를 진료하며 주민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해 왔다.

한때 로타리클럽을 창설해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고,도정자문위원직을 맡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역발전에 이바지 해 보자는 뜻이 있어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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