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7 13:15 (토)
착한 공직자들이 만든 비극

착한 공직자들이 만든 비극

  • 박형욱 단국의대 교수(인문사회의학교실)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3.07.26 06:00
  • 댓글 8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값비싼 현대의료 물쓰듯 지속할 수 없어
의료보장 지속가능성 위한 냉정한 운영 필요

박형욱 단국의대 교수(인문사회의학교실) ⓒ의협신문
박형욱 단국의대 교수(인문사회의학교실) ⓒ의협신문

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이 돈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가슴을 울리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고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2023년 우리나라 자산가 순위 1위인 김병주 MBK 파트너스 회장의 재산(약 12조 7000억원)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의 치료비를 지원해 주면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도 있다. 의료서비스 가격을 강제로 낮추는 것이다. 현대 의료는 비싼 의료다. 최근 국내 한 대학병원에 도입된 중입자치료기는 설치비용만 약 3000억원에 달한다. 치료비용은 약 5500만원이다. 너무 비싸다. 그것을 300만원 정도로 강제로 낮춰 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가난한 사람도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정부가 의료보장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반면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는 의료가 비싼 재화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3000억원에 달하는 설치비용을 무시하고 그냥 300만원으로 가격을 후려치는 횡포를 부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공동의 재원을 마련해 비싼 의료를 구매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의료서비스의 가격을 후려쳐서 가격을 낮춰 버렸다. 누구나 큰돈 안들이고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잘 굴러가는 것 같지만, 각종 부작용이 넘쳐 났다. 

의료기관은 박리다매·각종 검사·비급여에 의존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게 됐다. 대학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의과대학의 교수들도 연구보다는 박리다매·각종 검사·비급여 창출에 내몰렸다. 투여하는 시간을 보면 의과대학 교수들의 주 임무는 연구가 아니라 진료다. 교수들이 진료를 통해 병원 수입을 유지하지 못하면 그 기관은 존속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창의적이고 장기적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대학병원에는 전공의라는 저비용 대체 인력이 존재했다. 이들에 의존해 입원 시스템과 응급진료 시스템, 그리고 때로는 연구시스템마저 유지됐다. 다시 말해 전공의라는 저비용 대체 인력이 없다면 비용적으로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헐값에 밤샘 당직에 동원되어도 미래가 있다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전공의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구강사와 교수에게 밤샘 당직이 돌아왔다. 나이도 있다. 육체적으로 견딜 수가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진료 수입을 올리고 논문도 써야 하는데 밤샘 당직도 서야 한다. 이런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기이한 것이다. 

사실 대학병원 응급의료·외상진료 시스템은 군대와 같은 것이다. 군대가 계속 전투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용은 계속 들어간다. 그 비용이 아까워 전투할 때만 수당을 준다면 군대가 유지될 리 없다. 

벌써 오래전 일본 대학병원의 응급실은 중증 응급환자만 진료하는 것으로 운영됐다. 경증 응급환자는 그냥 중소병원으로 보내버렸다. 정부가 환자의 액세스를 제한한 것이다. 그리고 전투를 하지 않아도 군대의 비용을 지원하듯 중증 응급환자를 진료하는 대학병원은 충분한 예비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을 지원했다. 그게 한정된 자원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공직자들은 온통 착한 사람들뿐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환자의 액세스를 제한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액세스를 제한하라니? 의사들은 생명이 소중한 것을 모르는 것인가? 착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우리나라 공직자들이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진료 액세스가 좋은 나라가 됐다. 언제든 일차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널려 있다. 수술을 위해 큰 대학병원에서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원하면 중소병원에서 기다리지 않고 수술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주취자들까지도 응급실에서 받아 진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가 됐다. 생명이라는 명분으로…. 

값비싼 현대의료를 이렇게 물쓰듯하며 지속할 수 있는 의료보장 체계는 존재할 수 없다. 서구민주주의 국가의 의료보장은 그 운영이 매우 냉정하다. 안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고 환자의 액세스는 제한돼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서구 사회의 공직자들은 의료보장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착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우리나라의 공직자들은 국민에게 늘 좋은 말만 한다. 그래서 의료현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필수의료인력의 이탈은 더욱 가속화됐다. 착한 공직자들이 만든 비극이다. 

■ 칼럼이나 기고 내용은 <의협신문>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