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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오래된 음모 약사는 의사다

[기획취재]오래된 음모 약사는 의사다

  • 이정환 기자 leejh91@kma.org
  • 승인 2004.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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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땅 잃는 의사들-조제위임제도의 빛과 그늘(1)

<글 싣는 순서>
1. 오래된 음모 - "약사는 의사다"
2. 의료영역이 무너진다
3. 벼랑 끝에 선 1차의료
4. 누가 합의를 파기했나?
5. 정책실패의 원인과 대안


'의사영역 넘보기' 약사들 안간힘

약사생존 시나리오

"의약분업을 통해 약사의 임의조제를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
"성분명 처방과 일반약을 활성화시켜 약에 대한 권리를 약사들이 가져가야 한다."

내용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위의 두 인용구는 한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말도 아니다.

첫번째 인용구는 놀랍게도 지금부터 약 10년전인 1995년 11월 서울특별시약사회가 주최한 '21세기 보건의료와 약사' 심포지엄에서 나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이 약사도 아니며 약사회와는 무관한 보건대학 교수라는 점이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양봉민 교수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실제 발표자는 양 교수와 공동연자인 인제대 보건행정학과 김진현 교수다. 그러나 인지도를 고려해 이 글에서는 양교수를 발표자로 했다).

두번째 인용구는 지난해 말 대한약사회 회장에 당선된 원희목씨가 선거운동 중에 한 말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터울을 두고 어떻게 이런 똑같은 주장이 일관되게 되풀이 될 수 있을까? 원희목씨의 주장이 최근의 의약분업 상황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의약분업 논의 초기부터 이미 상정돼 있던 것은 아닐까?

즉 약계는 이미 10년 전부터 의약분업 도입 이후 벌어질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분업하에서 약사들의 생존을 위해 차근차근 시나리오대로 준비해 오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의사들이 수가 1% 올리기 위해 정부와 피터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에 약사들은 먼 발치에서 느긋하게 '의사가 되기 위한' 음모를 착실히 꾸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995년 가을의 발언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95년 11월 2일 목요일 오후 1시30분 한국과학기술회관 국제회의장으로 가보자. 양봉민 교수가 '보건 경제적 측면에서의 약국·약사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양 교수는 우선 "지금까지 약국공간에서 약사서비스의 주요 내용이었던 진단·조제·상담 중 진단부분에서 약사의 입지는 크게 축소될 전망"이라며 우려한다.

이어 그는 "약국 약사들이 의지를 갖고 향후 적극적인 제도참여를 통해 일차의료시장에서 약국의 역할 강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귀를 의심하지 말고 다시 들어보자. '의료'시장에서 '비의료인'인 약사가 그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약국의료보험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국가의료보장체계 내에서 약국·약사의 역할을 그만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고 이것은 차후 의약분업 과정에서 약사의 임의조제를 부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의약분업이 되더라도 대체투약권은 인정되어야 한다. 즉 상품명 처방에 대해서 약사가 약효는 동일하나 값이 싼 일반명 처방으로 대체하여 투약하는 것이 인정되야 한다.(중략)물론 가장 좋은 방향은 의약분업시 처방 자체가 상품명이 아니라 일반명으로 처방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양 교수는 끝으로 의료보험제도의 도입 이후 일차보건의료시장에서 약국의 비중이 점차 감소하는 현상을 못내 아쉬워하며 다음과 같은 당부를 아끼지 않는다.

"(상략)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일차의료의 중심 기능을 담당해 왔던 약국·약사로 하여금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약국은 여전히 많은 소비자들이 찾고 있으며, 약사는 경질환의 치료자로서, 자가치료의 조력자로서, 보건교육자로서 비용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사들의 주장

그런데 사실 양 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그당시 약계 내부에서는 어느정도 정립된 논리다. 즉 양 교수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기 보다 약계에서 충분히 검토된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양교수가 약계의 대변인 역할을 자청해왔다는 사실은 지난 2000년 6월 본지의 특종보도를 통해 낱낱이 폭로된 바 있다.

양교수는 대한약사회로부터 수천만원의 연구비를 받고 97년부터 '의약분업의 경제성 평가', '의약분업 시대의 약국경영모델 개발'등 약사회 논리를 배경으로한 연구물을 발표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쨌든 양 교수의 당시 주장은 이미 약계가 수년전부터 내부적으로 준비해온 그것과 다르지 않다. 대한약사회지 1993년 겨울호에 실린 '의약분업에서의 약국의 역할과 기능'(박남운·약사)이란 글을 보자.

양교수의 주장과 얼마나 유사한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다. 이 글은 "의약분업이 되면 전문의약품의 경우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에 의한 조제라는 변화가 수반되지만 일반의약품의 조제와 판매는 지금과 하등의 변화가 없다"고 운을 뗀 후 "매약에 비해 일반의약품은 그 범위가 상당히 넓기 때문에 의약분업이 시행된 이후에도 일반의약품의 임의조제는 여전히 약사의 몫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어 "의사의 처방전 발행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성분명처방을 강제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 놀랄 일은 "(성분명처방을 통해) 약사는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하면서도 값이 싼 약을 선택함으로써 국민의료비 절감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해 마치 의약분업 이후 보험재정이 파탄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돈 걱정이 최우선인 정부의 귀에 쏙쏙 들어올 말을 이미 해 놓고 있던 것이었다.

임상약학 혹은 약물요법(약료)

우리나라 약사의 임의조제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임상약학'이라는 학문이다. 임상약학(Clinical Pharmacy)은 지난 196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 학문의 핵심개념은 '약사와 환자, 의사 및 기타 의료종사자와의 밀접환 연대를 바탕으로 환자를 위한약의 지식을 구하는 것'이다. 즉 약사의 독자적 분야가 아닌 '전문직종간의 상호 연계'를 통해 약물의 치료효과가 구현되는 것이 임상약학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약사의 배타적 독립 분야로 교묘히 변질된다. 임상약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인물은 약계에서는 이 분야의 대부로 불리는 조윤성(서울대 명예교수)박사다. 조 박사는 76년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열린 제1회 국제임상약학교육법 학술대회에 참석, '약과 병의 3종 분류법'이란 주제발표를 했다.

조 박사에 따르면 이 3분류법이란 ▲의사약(의사요법) ▲일반인약(일반인요법) ▲약사약(약사약요법)을 말한다. 의사약은 처방약, 즉 전문의약품을 말하고 일반인약은 OTC 즉, 일반의약품을 말하는 것일텐데 도대체 듣도보도 못한 '약사약'이란 무엇인가? 그는 약사약을 이렇게 설명했다.

"약사약이란 원인이 확실히 규명됐고 비교적 간단한 임상검사표로 확인이 될 수 있는 질병에 유효약이 발견되었을 경우 이 유효약을 말한다." 여기서 약계가 표방하는 '약사요법(약물요법)'의 정의가 자연 도출된다.

그는 "약사요법은 환자의 임상검표 결과가 단일병에 병원인이 밝혀진 질병이고 약과 복약법이 임상의사의 다년간 사용결과로 확정된 질병인 경우, 임상검표를 기준으로 약사가 약사약으로 약물요법을 실시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즉 임상약학이란 약사가 약사 본인의 판단에 따라 경질환을 진단하고 약사가 마음대로 주무를수 있는 의약품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학문이란 뜻이다. 애초 임상약학이 가지고 있는 '전문직종간의 협력'이라는 핵심개념은 쏙 빼놓고 약물에 대한 약사의 배타적 권리만을 강조하는 기형적 학문으로 변질시키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약사요법을 행하려면 조 박사의 말대로 '약사약'이란게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약이 없다. 그래서 약사들은 의약품 재분류를 주장한다. 현재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의 2분류법을 뜯어고쳐 여기에 '약사약'을 추가하라는 것이다.

약계가 약대 6년제를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한 것도 이같은 임상약학 교육을 위한 것이다. 의약분업 시행보다 무려 25년 앞서 약계에는 이미 의약분업 이후 임의조제를 위한 학문적 배경을 세우고 준비해 왔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 밖에 없다.

임의조제를 향한 집념

임의조제를 향한 약사들의 노력은 거의 애절함의 수준이다. 약사들은 일단 '임의조제' 자체를 '범죄'로 여기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모든 경증 환자까지 무조건 병원에 가서 진찰 받으라고 권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최근 대한약사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약사회원의 글은 이같은 약사들의 정서를 대변하고도 남는다. 이 약사는 "진단과 치료에 있어서 의사와 비할 바는 못되지만 약물치료에 있어서는 국민들의 선택을 돕거나 직접 치료를 시도할 수도 있는 영역이 바로 약사집단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약사들은 오랜 관행처럼 굳어져 온 '약국=1차의료기관'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린 현실이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환자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소신대로 약을 지어주던 그때 그 시절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심정이다.

그래서 툭하면 끌어들이는 것이 '국민의 편의'다. 이 약사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국민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몸이 불편할 때 병원에 가고 싶지 않은 환자가 어딨습니까? 하지만 시간, 돈, 의료보험 등 여러 문제 때문에 가까이 있는 약국에서 해결하고 싶은 겁니다. 그걸 모두 자기들(의사들) 영역으로 끌어들이는건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고 국가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 글은 어느 정신나간 약사가 홧김에 투덜댄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대다수 약사들이 이 글을 읽으며 손뼉을 치고 통쾌해 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기획취재 2팀>
편만섭기자 pyunms@kma.org
조명덕기자 mdcho@kma.org
송성철기자 songster@kma.org
이석영기자 dekard@k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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