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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을 견딘 이들의 상처 보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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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2.1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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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의료봉사 후기
김승환 (연세의대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 태풍 하이옌으로 큰 피해를 입은 타클로반 지역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진료에 여념이 없는 의료진.

2013년 11월 초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에 큰 피해를 입힌 뒤 곧 병원 차원에서의 진료팀 파견 논의가 있었다.

당시 이미 많은 국가를 비롯해 NGO들이 재난 구호를 위해 필리핀에 들어간 상태였으며, 세브란스병원도 이에 동참하고자 했으나 현지 교통편의 어려움, 불안한 치안 문제 등이 발목을 잡아 초기에 파견이 이뤄지지 못했다.

▲ 김승환 (연세의대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대신 한 개 병원의 단독 지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료 지원에 의지가 있는 병원들을 네트워크로 구성해 중장기 지원을 위한 방도를 모색했다.

크리스마스가 낀데다 현지의 좋지 않은 기상으로 2박 3일만에 어렵게 도착한 타클로반의 상황은 처참했다. 복구가 안됐을 때 보도되던 것과 같이 길가에 시신이 그대로 방치된 정도는 아니였으나, 골조가 튼튼한 건물 이외에는 피해 지역 대부분의 건물들이 무너져 있었고, 태풍을 견뎌낸 건물들도 지붕이나 창문이 성치 못했다.

또 주민들은 수도와 전기의 공급이 끊어져 NGO들과 정부에서 공급하는 물배급에 의존해 간이 텐트에서 생활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이러한 재해현장에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의료의 모습은 엄청난 숫자의 외상 환자들과 이들을 치료하기 위한 수술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의료진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응급상황은 이미 넘긴 상태였다.

응급상황을 넘겼지만 필리핀 현지의 의료시스템은 엉망이었다. 필리핀 현지의 의료 시스템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적으로나 모두 붕괴돼(현지 의사들이 타 지역으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지역 거점 도시인 타클로반과 그 주변 지역이 순식간에 의료취약지역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의료팀이 현지에 들어간 시기는 복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였다. 타클로반 시내는 전기와 수도 공급이 일부 이루어지기 시작한 상태였고, 시내 몇몇 병원들은 그 기능을 어느 정도 회복해 자체적으로 환자 진료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만성 질환으로 약을 복용하던 사람들이 한 두달 약 복용을 못하면서 합병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가벼운 상처 감염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수술을 요구하는 질병이 되어 버리는 일들을 목격했다. 또 엄청난 재해를 겪고 난 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확인했다.

다른 이상 없이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았는데, 언어의 장벽이 있어 면밀한 면담은 어려웠으나 재난 이후 이런 환자들이 늘어난 것으로 볼 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우리의 주된 진료 대상은 아직 의료 시스템이 회복되지 못한 타클로반 주변 지역이었다. 진료 대상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했다.

▲ 깨진 유리창에 골조만 남은 창틀 등 열악한 진료 환경

첫째는 의료 서비스 이용이 거의 불가능한 시골 지역에 모바일 클리닉의 개념으로 직접 현장을 방문해 진료를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타클로반 외곽의 공공 병원인 LPH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모바일 클리닉은 지역 거점 도시인 타클로반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바랑가이(현지 행정단위로 우리나라 읍면 같은 개념)가 대상이었는데, 크리스마스가 겹치는 바람에 두번밖에 진료를 하지 못했다.

바랑가이는 전기와 수도가 끊겨 있고 지역의 기반 시설들이 모두 붕괴돼 있었기 때문에, 발전기부터 약품을 포함한 각종 진료용품들을 모두 트럭에 싣고 이동했다.

LPH의 경우는 병원 건물의 골조는 유지됐으나 대부분의 진료 장비와 물품이 침수로 못쓰게 됐고, 전기 공급이 여전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현지 의료진의 진료가 이루어지기는 하나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진료팀의 인력과 장비 지원을 현지 의료진들도 반가워했다. 찌는 듯한 날씨에 힘든 일정이긴 했으나, 주민들의 환대는 진료팀들에게 큰 힘이 됐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환자군은 기존 만성 질환의 악화, 감염성 호흡기 질환, 외상의 감염에 의한 합병증 등이 많았고, 대부분 재난 이후 의료 서비스를 전혀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인구의 밀도가 높지 않고 이동 수단이 원활치 않은 관계로 환자수는 하루에 1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주민들이 진료혜택을 받는 것이 비해 상대적으로 진료혜택을 누리지 못한 주민들에게 우리 의료팀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힘이 났다.

 

부족하나마 이러한 도움이 직접적인 질병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것뿐 아니라, 재난으로 상처받은 현지 주민들의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1주일의 의료 지원을 마치고 다음 지원을 이어서 맡아 줄 충남대 팀을 공항에서 잠깐 만난 뒤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사전 답사부터 많은 의료용품 지원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관계자 분들과 현지 선교사님들, 숙식과 현지 코디네이션을 지원 해준 세인트폴병원 여러분들과 예산 지원을 흔쾌히 허락해 준 현대자동차 정몽구 재단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현재도 계속 타클로반에서 의료 지원에 땀흘리고 있는 한국재난구호의료네트워크 팀들에게도 응원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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