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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곁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마음을 읽는다"

그들 곁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마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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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2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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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품고 뭍으로 돌아오다'
박수현의 선박의사 체험기 ③

 

배의 의료환경은 열악하다. 의료인이 탑승하는 배보다 그렇지 않은 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승선인원 혹은 배의 규모에 따라 의료인 탑승이 규정돼 있기는 하지만, 권장 사항에 머물고 이것 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모양새다. 사실 배에 탈 의료인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경우 사유서를 제출하고 의료인 없이 떠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그래도 승선인원이 100여명이 넘기에 이번 배엔 의사가 탑승했지만, 배의 규모는 우리 배보다 훨씬 커도 전체 탑승인원이 20명 남짓 되는 일반 상선의 경우 의사는 커녕 몇 시간 교육받은 항해사 중 의료관리자 자격증을 가진 사람 하나를 태운다는 규정이 있을 뿐이다.

의료관리자라는 것이 아무리 의료관련 교육을 받아도 당장 사고나 의료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순간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한 사람의 목숨을 놓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시술이나 처방의 경험부족으로 제대로 된 처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의사들 조차도 오랫동안 의학만 공부하고 그에 따른 자격증을 따고도 막상 병원에서 부딪혀보고 임상 경험을 쌓기 전까지는 응급상황에서 대처하고 환자를 보는 일은 두려움이 앞서는 일인데, 하물며 전문적인 의료교육조차 받지 못한 의료관리자에겐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의료관리자를 하면서 항해사 일과 기타 여러 가지 잡무를 해야 하는 형편에서 의료적인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 의료인이 탑승하는 배보다 그렇지 않은 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승선인원 혹은 배의 규모에 따라 의료인 탑승이 규정돼 있지만, 권장 사항에 머물고 이것 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다.

배는 의료 사각지대

그렇다고 배가 안전한 곳인가를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일하는 산업 환경보다도 위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위험물질 혹은 무거운 물건들을 다루고, 내부의 복잡한 기계와 돛, 밧줄 등을 사용하는 배는 곳곳에 위험요소가 산재돼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있을 당시엔 그리 큰 외상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나, 얼마전 항해를 마치고 배를 점검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내부 연결관이 터지는 바람에 일부 선원들은 쇠 파편이 몸 여기저기에 박히고 뼈까지 손상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승무원 몇몇은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 중상이었다니 "만일 항해 중에 발생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배 안에서 사람들이 직접 겪었던 경험을 들을 때마다 배는 의료 사각지대 같은 느낌이다. 다행히 이번 항해에는 큰 사고는 없었다.그래도 창상·감염 등 이런 저런 소소한 일을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몇 달은 기본이고 길게는 1년 이상을 타야 하는 오랜 항해 중에는 다양한 사고와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상황을 자체 내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아프게 되면 집·가족 생각에 서러운 것은 당연하다. 더 서글픈 것은 다치고 나서도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뜨거운 기름에 화상을 입고, 무거운 기계가 떨어져 골절이 생기고, 날카로운 모서리나 배 밖의 덜 다듬어진 부위에 찢어져도 정박할 때까지 제대로 된 처치도 못 받고 그 상태로 방치된 채 견뎌야만 한다.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지 않겠는가, 정박을 앞당긴다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항구까지 하루 이상 걸릴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다쳤다는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 마냥 취급되고, 승진에도 불이익을 미칠 수 있다고 하니 괜시리 내가 억울해진다.

배에 실린 물품들은 국토해양부에서 지정한 선박 응급의약품의 표를 기준으로 따른다. 그럼에도 실제 승선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기본이 안돼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인튜베이션용 튜브는 있지만 라링고스코프는 없다.

정말 응급한 상황, 기도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환자에게는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에 처치를 해야 하는 의료인 입장에서는 도구 하나하나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또 봉합을 할 수 있는 니들홀더·시져·포셉들은 있지만 어느 곳에도 멸균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즉 수량만 갖춰져 있을 뿐 실제 사용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배 내부에서 시술 전 혹은 후에 가장 기본적인 의료기구들을 소독할 수 있는 여건도 안된다. 가장 중요한 멸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힘든 열악함과 쓸 수 있는 약제의 한계가 상존한다. 기능에 따라 분류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성분의 약제가 아니라 대증적인 약제가 더 많다.

그것은 대부분의 약제를 비의료인이 주문하기 때문이다. 신경안정제;우황청심환, 고름 및 상처 치료제;이명래고약 등등으로 통해 바른 약제 선택에 어려움이 있다.

▲ 배는 의료의 사각지대다. 의료관련 교육을 받은 의료관리자도 사고나 의료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의료관리자 실습 교육을 받고 있다.

우황청심환에서 이명래고약까지

그러고 보면 배는 의사가 시술 내지는 치료를 하기에 열악한 환경이다.게다가 의료관리자를 맡고 있는 삼항사는 보통 선원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데 다친 환자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시행할 수 있겠는가.

결국 경험 많은 선장이나 선원이 대충 꼬매고 처치하며 당장의 응급상황을 막는다. 그러다보니 내부 구조물이라도 손상돼 유착될 경우에는 평생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발생 가능한 여건을 가지고 있기에 전시에 한국 국적의 배들은 각기 역할을 가지고 그 목적이 변한다고 한다. 내가 탔던 배는'의료선'이 되는 배였다. '의료 전문 선박'에 대해 꿈꾸며 배를 배우기 위한 목적을 내심 갖고 있었기에 이 배 한구석에 써 있는 의료선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이런 약품과 도구로 '의료선'이 돼 다녀야 한다니…. 그럼에도 처음 탄 배가 의료선의 가능성이 충만한 배이어서 이것 역시 운명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해야 할 숙제가 많다는 것은 또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항해에 동참하면서 그들의 사건사고에 공감하다 보니 고쳐지지 않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불평만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항해 의사로 함께 하면서 좋은 점이 더 많았다. 큰 병원에만 있다가 승선한 입장에서는 아무런 검사도 할 수가 없으니 처음에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처방을 하라는 것인지. 하지만 이내 익숙해지고 나니 오랫동안 환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이러다 보니 자연히 과거력·가족력·약 복용력 등 놓칠 수도 있던 정보를 챙길 기회가 많았다. 또 처음으로 돌아가 이렇게 저렇게 오감을 모두 사용해 환자 신체 곳곳을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눌러보고 들어보며 관찰할 수 있어 좋았다.

그들의 삶 속으로…마음속으로…

배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 해보자가 모토였기 때문에 시진·청진·타진·촉진 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화장품 젤을 손가락에 묻혀 혈변이 있었다는 환자의 직장수지 검사를 하는 등 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을 동원해 질환을 배제시키고, 포함시켰다.

검사 종류나 기계가 많지 않았던 시절, 신체 검사를 통해 족집게처럼 병을 찾아냈다는 옛 명의들을 떠올리며 현대의학은 기계나 검사에 너무 의존해 기본적인 신체검사에 무심해지지 않았나 싶었다.

아무리 문진이 중요하고, 아무리 검사 결과가 중요해도, 직접 환자의 얼굴과 혈색 그리고 시·청·탁·촉 등의 신체 검사를 통한 신체적인 반응을 의사가 보는 것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에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팠던 학생들은 치료과정에서 보기만 해도 얼마나 좋아졌는지 얼굴에 써있다. 환자-의사간의 시간과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뼛속 깊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며칠이 지나면서 학생·교수·조교 뿐 아니라 승무원까지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기는 힘들었지만, 보는 순간 저 학생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던 아이, 저 사람은 COPD(만성기관지염)이 의심되고, DM이 있는 환자 등 사람을 구분하는 마법 같은 눈을 갖게 됐다.

많은 시간을 들여 환자와 이야기 하고, 소소한 건강상담을 해주고, 걱정을 들어주며 오랫동안 환자를 진찰하고 매일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물을 수 있어 좋았다.

이처럼 팀닥터가 된다는 것은 학생들, 승무원들의 병력, 가족력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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