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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묘비명

청진기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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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9.0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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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인하의대 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 황건(인하의대 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올 봄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이 타계했다. 캐머런 수상은 "영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묘비명을 적어야 한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이태전 런던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때 방문했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이 떠올랐다.

사원에는 엘리지베스 1세·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 등 왕이나 여왕의 무덤이 안치돼 있었다. 초서 스펜서·테니슨 등이 묻힌 '시인의 코너'도 있었으나, 관심을 갖고 본 곳은 다빈치코드로 유명한 뉴턴의 기념비였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그는 그가 저술한 네 권의 책을 오른쪽 팔 밑에 받치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지구가 그의 위에 떠 있었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적은 묘비명이 있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 속에 누워 숨겨져 있었다.

신이 '뉴턴이 있어라' 하시자 모든 것이 밝아졌다"(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이런 영광스런 묘비명이 또 있으랴! 하고 생각하며 혹시 의사도 이곳에 묻혔나 찾아보았다.

단 한 명 월리엄 부첸이 있었다. 'Author of the Domestic Medicine'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도 아마존에서 팔리는 역사적인 책의 저자이기에 이런 곳에 묻혔구나 생각하면서 문득 나의 묘비명에는 무엇을 적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적을 것이 별로 없었다.

묘비명이란 본인이 죽고난 뒤 남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짧은 글이겠지만 50대 중반을 지나가면서도 떠오르는 것 조차 없다는 사실에 약간은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사원을 돌아보고 나가려는 데 문득 낯익은 이름의 석판에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화학교과서에도 얼굴을 볼 수 있는 '주울'이었다. 특이하게도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확립하고, 열의 일 해당량을 결정한 제임스 프레스콧 주울의 업적을 기억하며 뉴턴, 허스첼(천왕성발견)과 다윈의 무덤 근처에 그의 석판을 세운다"고 적혀 있었다.

주울의 묘비명에 자랑스럽게 적혀있던 F.R.S.(Fellow of Royal Society)에 대해 찾아보았다. 영국이나 영연방의 과학자나 공학자로서 자연과학·수학·공학·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학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그 동안 망설였던 '정년퇴임 보장 포기각서'를 쓰고 연구업적이 많은 교수들에게 주는 '인하펠로우교수'(Inha Fellowship Professor, IFP)를 신청했다.

이전에 없던 훌륭한 발견을 할 것도 아니고, 판을 거듭할 책을 낼 것도 아닌 바에야, 묘비명의 학위 뒤에 IFP라고 하나 적어보고자 하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내 자식들이 결혼해 손자, 손녀가 생기고, 내가 죽어 성묘를 올 때 묘비명의 약자들에 대해 내 아들딸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설명해 준다는 상상을 한다면, 논문을 써야 한다는 스트레스쯤은 별것 아니지 않겠는가?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묘비명에 직함을 적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위트도 없고 이례적이란다. 그러나 내 꿈은 IFP라는 약자 뒤에 숨어있는, 내가 추구했던 진정성을 후손들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