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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438쪽 검진평가서에 "끓는다 끓어"
coverstory 438쪽 검진평가서에 "끓는다 끓어"
  • 송성철 기자 good@doctorsnews.co.kr
  • 승인 2013.08.1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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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건강검진위, 의협 반대 의견 묵살한 채 계획 확정
658개 항목 리스트 점검에만 1시간…현실 외면 '탁상공론'

Cover Story

▲ 일러스트=윤세호 기자
"출근하자마자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는 일에 1시간 동안 매달려야 합니다. 앞으로 동네의원들은 건강검진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어요."

서울 강북지역에서 건강검진 의원을 열고 있는 A 원장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내온 438쪽 분량의 건강검진기관 평가서를 받아들고 한숨을 내쉈다.

경기도에서 내과의원을 열고 있는 B 원장은 "일선 의료기관의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직원들과 이틀째 평가서를 보고 있는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건 검진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위한 평가를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건강검진법에 따라 검진기관으로 지정받은 의료기관들은 서면과 현장평가를 받아야 한다. 지난해 병원급 검진기관이 평가를 받은데 이어 올해 의원급과 보건기관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시설·장비·인력 등 규모에서 차이가 나는 의원급 검진기관의 평가항목과 병원급 검진기관의 평가항목이 대동소이하다는 것. 병원급의 경우 일반(116문항)·영유아(48문항)·암(479문항) 등 총 662개 항목이고, 의원급은 일반(117문항)·영유아(30)·암(492) 등 총 658개 항목으로 전체항목수는 적지만 일반검진과 암검진 유형은 오히려 항목이 많다.

438쪽에 달하는 방대한 건강검진기관 평가지침서를 받아든 의원급 검진기관들은 "일반검진 평가문항만 117개이고, 암검진은 492개에 달한다"며 "수백가지 평가 문항을 기입해야 하고, 수백종에 달하는 서류까지 제출해야 하는데 의원급에는 평가를 준비할 여력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대한의원협회는 "인력이 풍부하고,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병원급 의료기관에서나 가능한 서면평가를 의원급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앞으로 의원은 검진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비판했다.

A 원장은 "신장계와 체중계는 공인된 계량검정시험에 합격한 공인계기를 사용하라고 하는데 어디에서 어떤 공인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공인이 안된 기기가 있다면 이를 시중에 유통시킨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세부적인 항목에는 혈압계의 영점 조정이나 체온계의 수은주 높이까지 살펴서 기록해야 하고, 청진기 상태까지 점검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힌 A 원장은 "체온계나 혈압계에 이상이 있으면 아예 측정이 되지 않는데 너무 세세한 것까지 점검하고, 서류작업을 하도록 하는 것은 검진의 질을 평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하기 위해 억지로 평가항목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일반검진에 유방암 검진까지 하고 있다는 C 원장은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점검하는데만 1시간이 넘게 걸린다"면서 "평가서를 읽어보고 과중한 업무를 감당할 인력이 없어 유방암 검진을 하지 않기로 했다. 검사의 정확도와는 상관없는 행정적인 잡무를 잔뜩 만들어 제풀에 지쳐 떨어지게 하려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C 원장은 "이럴바엔 검진을 아예 포기할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대한의원협회는 검진평가 항목도 많지만 항목 자체도 상당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사례로 혈액검사 항목을 들었다. 혈액검사의 경우 대부분의 검사를 외부에 위탁하고, 스틱을 이용해 원내에서 소변·단백뇨 검사를 하는 경우에는 내부정도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내부정도관리 기록 및 지침서 제출·정도관리물질 관련 지침서 사본 제출 등을 별도로 제출해야 한다.

기본적인 검사를 비롯해 모든 검사항목에 대해 원내지침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하며, 검사결과지를 이중삼중으로 보관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의원협회는 "검진평가 지표개발에 참여한 자문단의 대부분은 의원급 의료기기관의 실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교수들"이라며 "병원급에도 하기 힘든 검사항목들을 의원급에도 강요하고 있다" 지적했다.

"평가지표 개발의 주체인 개원의를 배제하고, 교수 중심으로 개발한 지표는 원천적인 무효"라고 밝힌 의원협회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은 지표는 전면 백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중한 평가 업무 감당할 인력 없어…"검진 포기" 고민

보건복지부는 "국가건강검진의 질 관리 향상을 도모하고, 부실검사를 차단해 대국민 신뢰도 및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건강검진평가를 실시한다"며 "평가결과를 공개해 검진기관이 자율적 질관리를 유도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체 전국적으로 의원급 검진기관은 1만 3950곳. 이 가운데 올해 평가를 받는 의원급 검진기관은 연간 검진건수가 300건 이상인 곳으로 일반검진(2336곳)·암검진(2704곳)·영유아검진(1947곳)·구강(471곳) 등 검진유형별로 중복되는 기관을 감안하면 4706곳에 달한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8월 30일까지 각 검진기관이 국민건강보험공단 검진기관평가정보시스템에 접속, 해당 사항을 입력토록 하고, 질관리 영역에 대해서는 자료를 제출받아 서면평가를 진행할 계획이다.

현장평가는 2014년 1월 2일부터 3월 14일까지 일반검진 100곳, 영유아와 구강검진 각 50곳, 암검진(진단의학·내시경학·병리학·영상의학·출장 분야) 각 1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하게 된다.

현장평가 대상기관은 ▲암질병 예측도 하위 5% 기관 ▲서면평가에서 필수항목을 충족하지 못한 기관 ▲서면평가에서 제출한 근거자료가 부실한 기관 ▲서면평가 자체 기입사항의 신뢰성이 의심되는 기관 ▲출장검진기관 ▲검진건수가 많은 기관 ▲민원이 접수된 기관 ▲부당청구 기관 ▲병리과가 있는 기관 중 대한병리학회 정도관리 인증을 받지 않은 기관 등으로 알려졌다.

평가결과는 90점 이상 최고 S등급부터 A(80)·B(70)·C(60)와 60점 미만 또는 필수항목 1개 이상 미충족한 D까지 5등급을 매긴다.

보건복지부는 의원급 건강검진기관을 평가, 결과를 인터넷을 통해 공개할 방침이다.

▲ 연 300건 이상 검진하는 의원급 검진기관은 8월 말까지 건강검진기관포털사이트를 방문, 웹에 직접 기입하는 서면평가와 질관리 영역에 대한 자료를 제출해 서류평가를 받아야 한다.

'서면결의'로 평가계획안 결정…"의견수렴 과정 문제"

'2013년도 건강검진기관 평가 세부계획안'을 결정하는과정에서 서면결의로 확정한 것으로 드러나 의견수렴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6월 5∼11일 2013년 첫 국가건강검진위원회를 열고 '건강검진기관 세부계획(안)'을 확정했다. 의원급 검진기관 4706곳을 대상으로 건강검진기관평가를 진행하고, 평가결과를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는 내용이 의결됐다. 위원들이 직접 참여하지도 않은 채 서면으로 세부계획이 확정됐다.

의료계는 서면으로 정책결정을 하다 보니 각각의 평가항목에 대해 충분히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고, 의료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사전에 검토해 보완하는 작업도 소홀했다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4706곳에 달하는 검진기관을 평가하고, 평가결과를 인터넷을 통해 국민에게 공개하는 민감한 정부 정책을 추진하면서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은 채 진행됐다는 것.

이욱용 대한검진의학회장은 "정부가 검진기관의 질을 높이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검진기관을 나란히 줄을 세운 다음 열악한 기관은 도태시키겠다는 식의 평가 방식은 문제가 있다"며 "더욱이 검진기관을 평가한다고 하면서 사전에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것은 행정절차 상으로도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검진기관평가 대상기관이 당초보다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정호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관리실 부장은 지난 3월 17일 열린 대한검진의학회 학술대회에 참석,'2013년 건강검진기관평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평가대상을 연간 검진건수 1000건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불과 석달 뒤인 6월 서면결의 과정에서 300건 이상으로 변경됐다.

일선 의료현장에서 검진기관평가를 놓고 비판 여론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는 9일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에 평가를 보류하고, 국가검진위원회를 다시 열어 문제점을 개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20일에는 건강검진개선위원회를 열어 비현실적인 건강검진기관평가 세부계획안의 문제점을 정리, 정부에 개선방안을 제안할 계획이다.

이재호 의협 의무이사는 "평가항목이 일반검진은 117개, 암검진은 492개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며 "평가항목의 적정성과 수용성을 감안해 평가항목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는 의협의 의견을 거듭 전달했지만 서면결의로 추진되다 보니 제대로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 의무이사는 "44개 필수항목 가운데 단 1개라도 충족되지 않는다고 D등급으로 처리하는 것을 일선 검진기관들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며 "적정성과 수용성을 감안하지 않은 채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무리수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민감한 검진결과 활용하겠다는 동의서 받아내라고?

 

수검자에게 검진결과 활용동의서와 문진표에 연락처를 기재토록 안내하고, 검진 비용을 청구할 때 반드시 전산으로 입력토록 요구한 것도 문제다. 환자의 민감한 개인진료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서명 하나로 가벼이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검진 정보를 집적하는데 대해 반드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만일 수 백만명이 넘는 검진결과 정보와 연락처가 유출되거나 민간회사로 흘러들어갈 경우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국민에게 충분한 설명을 통해 검진정보 제공을 납득한다 하더라도 정보 제공의 범위·기간·용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어떤 수검자가 검진결과를 활용해도 좋다는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수검자의 동의를 받는 일은 검진기관이 해야 할 몫이 아니다. 검진결과를 어떻게, 어떤 용도로 활용할 것인지 국민에게 떳떳하게 밝히고, 국민의 민감한 정보가 절대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 수준을 갖추고 있는지부터 알려야 한다.

환자의 동의율이 70%를 넘어야만 추가점수를 부여하겠다며 수검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아내라고 검진기관들을 압박하는 모습은 정의로운 모습이 아니다.

의원협회는 13일 성명서를 통해 "이번 의원급 건강검진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환자본인부담이 5500원에 불과한 검진수가를 현실화하고, 의원급의 현실에 맞는 평가지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의원협회는 이번 검진기관평가를 보이콧한다는 의미에서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해 달라는 입장을 의협에 건의했다.

의원급 검진 위축되면 수검률 하락 불가피

<2011년 건강검진통계연보>를 살펴보면 일반건강검진 수검률은 2007년 60.0%에서 2011년 72.6%로 12.6%가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암검진 수검률은 35.4%에서 50.1%로 14.7% 증가했다. 의원급 검진기관의 참여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검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건강검진으로 질환자를 조기에 발견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2011년 일반건강검진을 받은 1107만 569명 가운데 질환의심자는 35.5%(392만 9232명)에 달할 정도로 높다. 건강검진을 통해 조기에 질환을 발견하고, 조기에 치료함으로써 의료비를 절감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의료급여 수급권자를 비롯한 취약계층이 가까운 동네 검진기관에서 편리하게 건강검진을 받고, 생활 근거지 중심으로 사후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접근성 문제는 중요하다.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건강검진을 위해 질적인 면을 강조해야 하지만 전국민 평생 건강관리체계 구축과 사후관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동네의원에서 쉽게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접근성 문제를 간과해선 안된다는 것이 의료계의 입장이다.

이재호 의협 의무이사는 "불합리한 평가기준 때문에 의원급 건강검진기관들의 상당수가 저평가를 받는다면 이들 검진기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나빠질 수 있고, 병원급 검진기관이나 대형 검진기관으로 쏠림 현상을 부채질할 수 있다"며 "결과적으로 국가건강검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의무이사는 "평가를 위한 평가가 아니라 필수적인 항목으로만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평가항목 문항을 대폭 축소할 필요가 있다"며 "평가결과가 미흡한 검진기관에 대해서는 교육·자문 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질향상을 도모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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