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16 17:03 (화)
coverstory사무장병원의 유혹, 공짜 점심은 없다
coverstory사무장병원의 유혹, 공짜 점심은 없다
  • 이은빈 기자 cucici@doctorsnews.co.kr
  • 승인 2012.08.31 17:37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해의사 잇단 자살 의료계 '술렁'…환수규모 수십억대
의협 "경제적 어려움에 알고도 선택" 특단조치 강구 중

#1. 극심한 불황에 의원을 접고 의료 관련 사이트에서 구인광고를 뒤적이던 A씨. 어느날 한 광고가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무난한 근무조건에 파격적인 급여를 제시한 H병원이었다. 경영난으로 훌쩍 불어난 부채를 걱정하던 A씨에게 병원이 요구한 조건은 단 한가지. "곧 법인화할 예정이니 3개월 가량만 병원 개설자로 명의를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2. 지방 종합병원에서 수년간 봉직의로 근무한 B씨는 최근 지인으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지인이 다니던 교회 목사가 소유주인 땅이 있는데, 거기에 병원을 짓고 있으니 병원장으로 와 달라는 것이다. 평생을 꼬박꼬박 봉급만 받고 살아온 B씨에게는 병원장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도, 그로 인해 늘어날 대출 한도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목사는 "아무 걱정 말고 환자나 잘 봐달라"고 했다.

 

 

 

Cover Story

 

대한민국에서 의료인이 아닌 사람은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없다. 의료법 제33조에 명시된 이 조항을 어기고 비의료인이 의사면허를 대여 받아 병원을 운영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회는 실질적인 병원 소유주인 비의료인 보다 고용된 의사에게 무거운 족쇄를 지우고 있다.

8월 초 중학생과 고등학생 자녀를 둔 50대 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방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던 그는 사무장과의 불화로 막대한 환수 금액을 뒤집어쓰고 수차례 개인 회생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충남 천안 소재 건강검진센터에서 근무하던 60대 의사가 지난 5월 의원 옥상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그는 2010년 비의료인과 함께 의원을 설립, 운영해오다 이사장을 자처한 사무장이 무리하게 투자비용을 회수하면서 빚 30억 원을 그대로 떠안았다. 그의 지인은 "자살 전날까지 빚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전했다.

이른바 '사무장병원'에서 일한 의료인은 무거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우선 형사적으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며, 행정적으로는 의료법 위반으로 의사면허 자격정지 최대 3월의 처분을 받는다.

전체 요양급여비 환수에 과징금 5배 '폭탄'까지

이 정도 처벌 수준은 그나마 '수용가능한' 범위에 있다. 피해의사들이 세상을 등지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폭탄에 가까운 환수처분 때문이다. 사무장병원에서 청구한 모든 요양급여비용은 부당청구에 해당돼 요양급여비용 환수 및 업무정지·최대 5배에 달하는 과징금 처분을 받게 된다. 이는 명의 개설자인 의사의 몫으로 온전히 남는다.

최근 의료계에서 잇따라 발생한 자살사건은 이러한 사무장병원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단 금전적인 부분이나 운영 측면에서 사무장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남은 의사의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발을 빼지도 못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다.

'사무장병원 피해의사들의 모임(사피모)'을 운영하고 있는 오성일 원장(계양서울실버요양병원)도 40억원에 이르는 빚더미에 앉고 몇 번이나 '옥상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한 케이스다.

2006년 대학 선배의 소개로 사업가 홍 아무개씨를 만난 그는 홍씨가 80억원 넘게 투자했다는 일산 메디컬빌딩의 J병원장으로 부임, 대표원장직을 승계하는 포괄적 양수도계약을 체결하면서 일이 꼬였다.

지인을 통해 소개 받아 사무장병원임을 의심해 본적이 없다거나, 서류를 꼼꼼이 검토하지 않아 속았다는 해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은 8월 23일 오 원장이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제기한 의사면허자격정치처분취소 소송에서 일부 승소한 1심을 깨고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홍씨가 대표로 있던 회사는 상호 자체가 '주식회사'라고 명시돼 있어, 일반인으로서도 의료법인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오 원장이 취업약정을 체결할 때부터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없는 자에게 고용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바지원장 고용해 이득 챙기고 먹튀"

현행 법이 사무장병원에 혹독한 처벌을 가하고 있는 이유는, 비의료인 투자자가 따로 있는 병원 특성상 보험청구를 무리하게 하는 등 부실 진료가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용된 의사뿐 아니라 환자에게도 불이익이 생기는 것은 물론, 높은 부당청구 개연성으로 국가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박용언 대한의사협회 기획이사는 "사무장병원에서는 보험 청구에 혈안이 된 사무장이 본인부담금을 받지 않고 무조건 환자를 유치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박리다매식"이라며 "의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환자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진료권이 위축되고, 양질의 진료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환자를 '싹쓸이'해가면 지역 개원가도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실제로 몇몇 사무장은 더 많은 요양급여를 타내기 위해 의사가 하지 않은 시술도 마구잡이식으로 청구하다가 연말 부당청구 감사에 대거 적발되기도 한다.

초기 지인과 동업 형태로 운영된 사무장병원은 나날이 대형화·음성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방면에 사업을 벌여온 자본가가 빈 건물을 사들여 문어발식으로 병원을 짓고는, 바지원장을 고용해 쏠쏠한 이득을 챙긴 뒤 '먹튀'하는 식이다.

의사 헤드헌팅 관계자는 "예전에는 병원에서 일하던 의료기사들이 원장과 마음이 맞으면 동업하는 식이었는데, 요즘은 건물주나 분양주·부동산 컨설팅 회사 쪽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조건을 맞춰줄테니까 나눠먹기 하자'는 식으로 의사에게 제안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요양병원과 다른 사업체를 함께 운영하다가 다른 분야가 잘 안풀리자 병원에서 나온 고정수입을 받아서 우선 쓰고, 그러다 보니 병원 자체에 문제가 생겨 월급이 안나오는 경우도 봤다"면서 "결국 개설한 의사만 뒤집어 쓰고 물러나게 됐다"고 했다.

사무장병원 구별법 사무장병원 고용 의사의 법적 책임
▶업계 평균 대비 급여가 많다. 통상적으로 1.5~2배. 개설 명의를 빌려주면 '개설fee'라고 해서 200~300만 원 얹어주는 경우도 있다.
▶구인광고 시 '개설의사'를 구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 이 때 직급은 부원장급이 아닌 원장급이다.
▶형사-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
▶행정-의사면허자격정지 최대 3월 처분
▶사무장병원 근무기간 요양급여비용 전액 부당청구 해당 → 환수·업무정지 및 5배 이하 과징금 처분.

체인형 사무장병원 등장…피해규모 커져

사무장이 비영리법인의 명의를 빌어 체인형 병원을 운영하다 무더기로 검찰에 적발된 사례도 있다.

춘천지검 원주지청은 8월 28일 돈을 받고 비영리법인 명의로 병원을 개설하도록 해 준 혐의(의료법 위반 등)로 모 법인 전 대표와 법인 명의를 빌어 병원을 개설한 사무장 등 9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법인 전 대표는 사무장이나 의사들이 원주를 비롯해 전남 무안·인천 연수·경기 하남과 고양·충북 제천 등에 병원을 개설할 수 있도록 법인 명의를 빌려주고 기부금 명목으로 매달 100만∼150만원을 챙겼다.

또 사무장은 비영리법인 명의를 빌어 강원 원주에 병원을 개설, 불법 운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결과 그는 의사를 고용해 성형외과 환자들에게 내과 진료를 한 것처럼 허위 청구하는 수법으로 1700만원을 편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사무장들에게도 환수에 대한 연대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이는 민법상의 불법행위에 불과해 솜방망이 처분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명의 개설자인 의사에게 우선적인 책임을 떠맡기는 사이, 사무장들은 얼마든지 자산을 빼돌릴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오성일 원장은 "환수 폭탄의 최대 수혜자는 정부다. 의사도 사기 당한 피해자인데, 공범이라고 인식해 의사의 피와 땀을 쥐어짜고 있다"면서 "피해액이 기본 수십억대에 이르는 등 점차 환수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진신고 시 막대한 환수처분 감경해줘야"

'There is no free lunch in the world(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인용해 유명해진 이 말은 사무장병원의 명암을 잘 함축하고 있다. 자원이나 지식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어떤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다.

법망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간 사무장들이 제2, 제3의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애당초 명의 개설 등으로 얽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럴듯한 조건으로 의사들을 유혹하는 사무장병원의 열매가 결코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경각심을 일깨우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는 8월 29일 상임이사회에서 사무장병원을 척결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학생과 전공의, 봉직의·개원의 등 시기별 대상에 따라 사무장병원의 위법성과 위험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학생 때부터 의료법규 과목에서 진료와 경영 분리에 따른 법적·세무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개원 이후에도 반모임 등 지역 모임 활성화를 통해 각 과별 신고방법 및 사무장병원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알린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개원 실패로 인한 부채로 사무장병원임을 알면서도 택하는 의사들을 위한 대책으로 금융기관과의 협약을 통해 비개원의의 대출한도를 상향 조정하고, 이율을 하향조정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박용언 기획이사는 "사무장병원에 가담한 의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의사에게만 책임을 묻는 구조적 한계"라면서 "사무장병원을 처벌할 때 사무장의 부당이익을 국고환수하고, 징세하는 등의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이사는 "의협 자체 광고 모니터링을 통해 사무장병원을 엄격히 검열하고, 관련 국회 입법 활동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사무장병원임을 알면서도 택할 수밖에 없는 의사들의 경제 사정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부 고발이나 자진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사무장병원 근무기간의 전체 요양급여비용을 의사에게 물리는 과도한 처분을 감경해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신태섭 변호사(법무법인 세승)는 "일반적으로 경제력 있는 의사는 사무장병원에 발을 담그지 않는다. 사건을 쭉 지켜보면 피해의사들의 가족이 대납해주지 않는 이상 수십억원에 달하는 환수처분은 너무나 큰 법적 의무"라며 "자진신고 등 사유가 있을 경우 의료법상 행정처분과 마찬가지로 환수처분도 2/3 범위에서 감경해주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