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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책은 없고 처벌만 있는 '응당법'

시론 대책은 없고 처벌만 있는 '응당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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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8.0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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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석 교수 기고] '응당법'을 통해 본 한국 의료정책의 현주소

▲ 허대석 서울의대 교수
2010년 11월 21일 오전부터 배가 아프다는 4살 여아가 급기야 토하기 시작하자 집에서 가까운 대구시의 A대학병원 응급실을 오후 4시경 찾았다. 하지만 소아 전문의가 없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권했고, 옮겨 간 B대학병원에서도 역시 제대로 진료 받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중첩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구미의 C대학병원 응급실로 갔으나 결국 다음날 새벽 사망한 사건은 ‘응급실 전문의 당직의사제’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250만명 인구에 4개 대학병원이 있는 대구에 응급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장중첩증의 진단과 치료에 고도의 의료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11월 21일은 일요일이었다. 병원에는 경험 많은 전문의는 없고, 인턴과 전공의만 당직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심근경색과 같은 질환에서 주말 진료를 받은 환자의 사망률이, 평일 정규시간대에 진료를 받은 환자에 비해 유의하게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주말이나 야간 당직시간대에는 병원에 근무하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생색은 보건복지부가, 책임은 의사가 지는 병폐 반복

이후에도 응급의료와 관련하여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자,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고, 2012년 8월 5일부터는 응급실 호출은 당직 전문의가 받고 직접 진료하며, 당직전문의가 응급실에 오지 않을 경우 병원에 과태료를 물리고 당직 전문의는 면허정지 처분을 받게 하는 시행규칙도 마련되었다. 이제부터는 응급의료와 관련된 사고나 민원이 발생해도 보건복지부가 책임질 일은 없게 되었고, 의사만 처벌하면 된다. 생색은 보건복지부가 내고 책임은 의사가 지는 한국식 의료행정의 병폐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의료계 현실상 시행이 불가능한 법을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으면 벌금형과 면허정지를 하겠다고 하는 ‘응급실 당직법’에 의료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응급의학전문의 진료 후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의 20-30%인데, 이들 환자에 대한 응급실 호출은 진료과별 전문의가 받고 호출을 받은 전문의가 직접진료를 해야 한다면 규모가 작은 병원의 경우, 진료과별로 전문의가 1명에 불과한 중소병원의 의사는 주간 근무와 야간당직을 매일 해야 한다.

해당의료기관에 개설된 모든 진료과목별로 당직전문의를 지정해야하고, 비당직 전문의도 응급실 근무의사의 판단에 따른 호출 불응시 처벌대상이 될 수 있다는 법조항은 응급의료기관으로 지정된 458개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는 언제 호출을 받아도 병원으로 가야만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며, 다시 말해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실제 응급실 당직법 시행으로 처벌을 받는 병원과 의사가 생기면 응급의료기관 지정을 반납하겠다는 병원들로 응급의료체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상대적으로 많은 전문의가 근무하는 수도권의 대형병원 상황도 간단하지 않다.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응급실을 방문하는 환자들이 단일 질환으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학적 문제가 복합된 상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평소 당뇨병과 신부전으로 오랫동안 진료를 받던 83세 할아버지가 호흡곤란과 의식혼탁으로 응급실에 도착하여 검사상 폐렴과 심부전, 뇌경색이 의심되는 상황이라면 어떤 과 전문의를 호출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론상, 내분비내과, 신장내과, 감염내과, 순환기내과, 신경과 등 다양한 분야가 협진을 해야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형병원일수록 전문의도 전공분야가 대단히 세분화되어 있어 내과전문의라도 어떤 세부전공인가에 따라 내과 환자이지만 진료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문제는 전문의제도의 구조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어 응급의료법개정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의료기관의 노력으로는 한계...보건복지부가 '결자해지'해야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진료과 당직의사문제에 국한하여 외국제도와 비교한다면, 미국도 전공의나 인턴 인력에 의존하여 당직체계를 운영해오다가, 전공의들은 경험이 적고 또 업무량이 과도하게 많아서 의료사고가 반복해서 발생하자, 환자 안전을 위하여 전공의의 근무시간을 주당 80시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2003년 규정하였다. 이후, 응급환자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과계 환자에 대하여 세부전공전문의가 아닌 일반내과 혹은 소아과 전문의를 병원이 별도로 고용하여 전담하게 하고 야간이나 휴일 당직도 이들이 책임을 진다. 현재 미국의 대부분의 병원이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3만명이상의 내과계 전담 전문의(hospitalist)가 활동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제대로 된 응급의료 서비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문 인력 투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에 맞게 의료제도도 개편하고 추가적인 재원 확보도 필요하다. 이런 대책은 없이, ‘응급실 근무의사가 비당직 전문의까지 부를 수 있고, 불렀는데 오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것은 대부분의 의사들을 잠재적 범법자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입법사례에서, 비당직 전문의에게 의무를 부여하거나 불응시 면허정지를 규정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법시행을 하루 앞둔 8월 4일 보건 복지부는“응급의료법 하위법령 개정에 따른 의료기관의 충실한 준비와 의료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3개월의 계도기간을 운영하며 행정처분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현재의 의료현실에서 각 의료기관이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결자해지가 아닌가? 공은 보건복지부로 넘어갔다.

 

                              허대석(서울의대 교수ㆍ내과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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